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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체르노빌 원전 사고-20세기가 보내온 생명 파괴의 경고(한정숙)

환경과 역사

체르노빌 원전 사고

―20세기가 보내온 생명 파괴의 경고

한정숙

체르노빌(Chernobyl). ‘체르노브일’이라 쓰고 ‘체르노’ 다음에 ‘브일’을 함께 빨리 읽은 뒤 혀를 경구개에 살짝 대었다가 떼어내면 원음에 가까워진다. 아, 이곳은 우크라이나 땅에 있으니까 우크라이나 식으로 읽으면 ‘초르노브일’에 가깝다. 러시아어 체르노브일, 우크라이나어 초르노브일은 봄이 오면 들판에 지천으로 자라나는 풀인 쑥의 한 종류를 뜻한다. 쑥은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식물이다. 그만큼 이 도시 이름은 자연친화적이고 소박한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체르노(러시아어), 초르노(우크라이나어)는 ‘검은’이라는 뜻을 가진다. 브일은 ‘이다’ 혹은 ‘있다’를 뜻하는 말의 과거형과 거의 같다. 그러니 그곳은 ‘검은 곳이었다’라고 해야 할까? ‘불에 타버림’이 그곳의 원래의 숙명이었을까?

그런데 나는 왜 이 지명을 두고 발음이니, 글자를 쪼갰을 때의 의미니 하는 사소한 것을 꺼내들며 미적거릴까? 한가해서일까? 아니다. 이곳 이야기를 하기가 그만큼 힘들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이곳에 대해 무언가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잡아먹고 크게 숨을 들이쉬어야 한다. 체르노빌은 아우슈비츠, 히로시마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지명이 아니다. 그것은 대명사이고 상징이다. 아우슈비츠가 인종학살의 대명사이고, 히로시마가 전쟁과 핵무기로 인해 인류가 맞은 참사의 대명사이듯, 체르노빌은 소위 핵에너지의 평상시(이른바 평화적) 이용에서 빚어진 비극을 대표하는 대명사이다. 1986년 4월 26일 새벽,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제4호 원자로가 폭발함으로써 빚어진 인명 손실, 자연 파괴, 건강과 생명에 가해진 끔찍한 손상과 계속되고 있는 위협은 이곳의 이름을 시간 속에 정지시켰고, 영원히 전율스러운 것으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지금 체르노빌이라는 말에서 괴물, 기형, 유령도시 등의 단어를 우선 떠올린다. 그러나 이곳은 동슬라브 역사에서 오래 전부터 기록에 등장하는 고도이자 벨라루스(Belarus)에 가까운 국경지대,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평화스럽고 고즈넉한 거주지였다. 2차 대전 중에는 독일군의 침공으로 피해를 겪기도 했지만, 그 후에는 특별한 일만 없었다면 평화와 고즈넉함이 계속되었을 것이다. 원자로의 폭발이라는, 특별한 일 가운데서도 특별한 일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20세기 후반 소련의 핵에너지 정책

2차 대전 이후 체르노빌 참사 이전까지 소련은 원자력 찬가가 울려 퍼지던 나라였다. 많은 원자력발전소가 지어졌고, 소련 지도부는 원자력의 안전성, 청정성, 효율성을 선전했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론, 소련 에너지산업의 전환 필요성 등이 여기에 고루 영향을 미쳤다.

미국에 이어 소련도 1949년에 원자폭탄 제조에 성공했다. 냉전시대 소련이 양대 초강대국의 하나로 미국과 자웅을 겨룰 수 있었던 데는 사회주의적 산업화와 분배체제가 궤도에 올라선 뒤 체제경쟁이 전 세계적 관심을 모았던 점도 작용했지만, 무엇보다 이 나라가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핵 강국이라는 사실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물론 핵무기 경쟁을 공공연히 강화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였다. 1950년대 이후 동서 양 진영 사이에서는 냉전의 일시적 강화와 긴장 완화가 교대로 나타났지만 전체적으로 핵전쟁을 피해야 한다는 당위론이 국제사회에서 공유되었다. 그렇지만 핵보유국 정부들과 핵에너지 관련자들은 핵무기도, 핵무기 생산과 관련된 기술도 결코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여기서 핵보유 열망을 충족시키면서도 이를 좀 덜 폭력적이고 좀 더 윤리적으로 보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 것이 이른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개념이었고, 이에 바탕을 두고 ‘평화를 위한 원자력(Atoms for Peace)’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1 이들 개념은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대통령이 1953년 12월 8일 유엔 총회에서 행한 연설 이후 일반화되었다. 육군 장성 출신 정치인인 아이젠하워는 강대국들의 핵무기 개발 경쟁으로 미국의 핵 독점이 깨졌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의 이 연설을 촉발한 계기가 된 것도 몇 달 전인 8월 12일 소련에서 수소폭탄 제조를 위한 열핵 폭발이 성공했다는 사실이었다.2 아이젠하워는 평화를 위해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의 손에 핵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고, 소련을 향해서도 핵을 평화적으로 이용하는 데 동참하자고 요청했다.3 1954년의 유엔 9차 총회는 12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 결의문은 “원자력 에너지의 발견에서 비롯된 여러 이득은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고 천명했으며, 평화적 목적을 추구하고 생활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한 원자력 에너지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장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

그런데 사실 소련은 아이젠하워의 연설 이전부터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론을 내놓은 바 있었다. 소련의 유엔 대표였던 안드레이 비신스키(Andrey Vyshinsky)는 1949년 11월 유엔 총회에서 자국의 핵무기 개발을 옹호하며 이렇게 말했다. “소련이 원자력 에너지를 사용한 목적은 핵폭탄 저장량을 축적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 소련은 산을 폭파하고 강줄기를 바꾸며 사막에 물을 대고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지역에 생명의 새 길을 내는 것과 같은 국내 경제적 목적을 위해 원자력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었다.”5 소련은 1950년대 초에 경제적 목적으로 원자력을 이용하기 위한 자체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개발 중이었다. 따라서 국제사회에서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 담론이 호응을 얻자 소련도 반대하지 않고6 오히려 이를 활용했다. 소련 수소폭탄의 아버지 사하로프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열렬히 옹호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7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 개념은 토목 건설, 석유 및 가스 채취, 농업, 의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 용법과 관련해 사용되었지만,8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 것이 곧 핵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바꾸는 작업인 원자력발전이었다. 미국과 소련이 원자력발전에서도 최강국이 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실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은 핵무기 생산기술을 유지한 채 이 기술을 활용함으로써 필요한 경우에는 핵무기 생산으로 전환할 수 있게 해주는 안성맞춤의 도구였다.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을 위해 사용되는 기술은 핵무기 제조에 사용되는 기술과 기본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9 원자로 노심에 사용되는 우라늄, 원자로에서 사용하고 남은 연료봉을 재처리해서 만드는 플루토늄 239가 핵무기의 원료가 되는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10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한편 20세기 후반 소련에서 전통적 에너지산업은 저효율 산업이 되어가고 있었다. 번성하던 가스 석유산업은 1970년대 중반부터 일시적인 쇠퇴 국면에 들어섰다. 오일쇼크 이후 국제시장에서 석유 가격이 하락했고, 석탄 매장량이 줄어들면서 전통적인 기술로 석탄을 캐내기도 어려워졌다. 석탄산업 중심지가 시베리아 극동 지역으로 이동하자 에너지 산지와 공업 지역이 너무 멀어졌다.11 이 때문에 1970년대 소련 정부는 공업지역 가까운 곳에 발전소를 짓기로 결정했다. 원자력발전소는 이를 위한 좋은 해결책이 될 것으로 보였다.

러시아연방에는 1950년대에 건설된 첼랴빈스크 원전을 비롯해 레닌그라드, 쿠르스크, 스몰렌스크, 코스트로마, 노보보로네슈 등 여러 곳에 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되었지만 특히 우크라이나공화국은 원자력발전소가 밀집한 곳이었다. 우크라이나는 고도로 공업화된 지역이어서 전력 수요도 컸지만, 소련 정부는 원전 생산 전력을 수출하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었다. 체르노빌 발전소에서 가동된 원자로는 소련에서만 사용된 RBMK형이었지만, VVER형 원자로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제작되었고 수출되기도 했다.12

체르노빌 발전소는 소련 정부에 의해 1960년대에 건설 결정이 내려진 뒤 1970년대 초반부터 지어졌다. 1978년에 1호기가, 1979년에 2호기가 각기 1,000메가와트의 전력을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4호기는 1983년에 건설되었다.13

체르노빌 이전 소련의 원자력발전소 사고

소련 정부는 원자력이 청정한 에너지이며 특히 소련의 원자력은 안전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 자신이 한때 체르노빌 발전소에서 일했고 방사능 질병에 걸려 치료를 받은 적이 있는 핵 기술 전문가 그리고리 메드베데프의 증언에 따르면, “35년 동안 학술원 회원들은 핵 발전소는 심지어 가장 간단한 러시아식 대형 물주전자(사모바르)보다 더 안전하다고 누구에게나 보증했다.”14 소련의 원자력발전소에서 크고 작은 사고가 끊이지 않았음에도 그러했다. 예를 들어 1958년에는 우랄산맥 부근의 첼랴빈스크 원전에서 사고가 일어나 여러 마을을 파괴했다. 이 사건은 발생 당시 진상이 드러나지 않았고, 그래서 소련 출신으로 영국으로 망명하여 1970년대에 이 사건에 대한 책을 집필한 조레스 메드베데프만 하더라도 정확한 연도를 몰라 이 사건이 1957년 아니면 1958년에 일어났다고 썼다.15 현지 주민들은 사고가 일어난 것은 알았지만 원자력발전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핵폭탄이 폭발한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16 조레스 메드베데프 자신은 이 사고가 지하에 묻어놓았던 핵폐기물이 대기 중에 유출됨으로써 빚어진 것이라고 보았다.17 그의 주장은 이후 사실로 받아들여졌다.18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논쟁의 구도이다. 이 사건의 원인에 대한 논쟁에서 ‘핵폐기물 관리 소홀로 인한 사고는 반핵 투쟁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 등장했다. 예를 들어, 1972년 소련에서 이스라엘로 망명한 학자로서 이스라엘의 원자력발전 강화 필요성을 역설했던 레프 투메르만은 이 사고가 원자로 사고였다는 미국 정보원들의 주장을 일축하고 핵폐기물 관리 소홀로 인한 사고임을 강조하면서, 이것이 핵 발전 반대 투쟁의 무기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썼다.19 원자로 사고이건 핵폐기물 사고이건 모두 핵 발전과 관련된 재앙임을 지적하는 오늘날의 원전반대운동의 논리에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입장이다.

소련에서는 이후에도 크고 작은 원전 사고들이 일어났다. 1974년 2월 레닌그라드 원자력발전소 제1호 원자로에서 사고가 났을 때는 세 명이 사망했고, 체르노빌에서도 이미 1982년 9월에 1호기 원자로 작동 오류로 방사성물질이 프리퍄트시市로 퍼져 나가는 일이 있었으며, 1985년에는 발라코보 원자력발전소의 사고로 14명이 사망했다.20 그러나 이런 사고들은 일반 주민들에게 보도되지 않았고, 소련인들은 원자력발전의 안전성을 계속 신뢰했다. 이 믿음에 근본적으로 도전한 것이 1986년의 체르노빌 사고였다.

체르노빌 사건의 경과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에서 새벽 1시 23분 48초 무렵부터 2~3초 간격을 두고 엄청나게 큰 두 번의 폭발음이 울렸다. 4호 원자로의 폭발음이었다. 당시 체르노빌 발전소에는 4기의 원자로가 가동되고 있었고 5, 6호기의 건설이 막 시작된 상황이었다.

체르노빌 발전소의 원자로는 1954년 소련 오브닌스크에서 개발된 흑연감속 비등경수 압력관(RBMK)형으로 1기당 1,000메가와트의 전력을 생산하는 고성능 기구였다. 그래서 체르노빌 원전 4호기는 RBMK 1000형이라 불렸다. 이 유형의 원자로는 1973년부터 가동되기 시작해 1986년에는 소련 내에 모두 14기가 가동되고 있었으며 1980년에는 소련 전체 원자력발전량의 64.5%를 차지했다.21 RBMK형 원자로는 압력관이라 불리는 금속관 속에 핵연료를 넣고 이 압력관을 흑연감속제 파일 속에 관통시켜 노심을 이루게 한 것이 특징이다. 정상가동될 때는 아주 안전하지만 출력을 낮추었을 때 통제가 어렵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원자로 밖으로 모두 빠져나왔다 속으로 내려갔다 하면서 작용하는 제어봉의 특이한 작용과 관련되어 있었다. 제어봉이 모두 빠져나왔을 때 갑자기 핵분열이 가속화할 수 있었다.22 사후에 지적된 이 원자로의 또 다른 단점은 격납용기 안에 들어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23

사고는 4월 25일 밤부터 26일 새벽 사이에 원자로 4호를 대상으로 비상시에 냉각수를 공급할 전력 확보를 위한 실험을 하던 중에 일어났다. 원자로를 식히는 냉각수 공급을 위해서는 통상적인 전력 공급이 중단되더라도 자가발전용인 디젤발전기가 가동하여 전력을 제공하게 되어 있었는데, 디젤발전기의 작동에는 40~50초의 사간이 필요했다. 이날의 실험은 증기터빈발전기의 관성력을 이용해 이 짧은 공백을 메울 소량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지 알아보려는 것이었다.24 다시 말해 이는 사고를 막기 위한 실험이었다.

이날의 실험 담당자들은 실험이 기기 조작 매뉴얼을 따라 착오 없이 진행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실험을 위해 원자로 출력을 낮추는 과정에서 제어봉 사용에 무리가 있었고, 그로 인해 원자로의 온도가 불안정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일련의 연쇄 과정으로 원자로 노심 온도가 수직 상승했고, 새벽 1시 22분 30초에 원자로를 끄라는 비상 경고 신호가 있었으나 기기 조작자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운명의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두 차례 폭발로 높이 64미터에 무게 천 톤에 달하는 원자로 덮개가 날아갔고 원자로가 파괴되었으며 붉고 푸른색을 띤 불길이 치솟았다.25

파괴된 원자로 사고 이후 붕괴된 원자력발전소의 참상. 굴뚝 앞부분이 파괴된 4호 원자로이다.

사고가 나자 목격자들과 관련자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화재가 난 것’으로 인식했다. 발전소의 차석 엔지니어 댜틀로프는 ‘가스 폭발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26 불길이 치솟자마자 담당 소방관들이 달려와 진화 작업을 시작했다. 백 명도 넘는 소방관이 워낙 치열하게 작업했기에, 새벽 5시에는 일단 진화가 된 듯했다. 그러나 낮부터 또다시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27 모스크바에서 내각 부총리 시체르비나를 비롯한 고위 인사들이 체르노빌로 모여들어 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곧 위원회의 명에 따라 화재를 진압하고 방사성물질의 유출을 막기 위한 특수작전이 전개되었다. 군 헬리콥터가 동원되어 납, 모래, 자갈 등 무거운 물질을 자루에 넣어 공중에서 원자로 안으로 투하했다.28 이렇게 던져넣은 물질이 5,000톤에 이르렀는데, 원자로가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 와해될 위험이 있었다.29 결국 모래 투하는 중단되고, 그 대신 콘크리트 덮개로 원자로를 덮어 싸게 되었다. 이미 방사성 재와 가스가 온 사방으로 퍼진 다음이었다. 이때 방출된 방사성물질 가운데 반감기가 긴 원소들은 여전히 대기와 토양, 물, 동식물, 건물, 그리고 인간의 몸속에 들어 있거나 붙어 있다. 사고는 이렇게 잠깐 사이에 일어났고 영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우크라이나 정부는 사고 원자로 둘레에 새로운 콘크리트 엄폐물을 마련하기로 했다.

희생자들과 피해자들

체르노빌 사건의 희생자 수는 논자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사고 뒤 며칠 만에 발간된 『뉴욕 포스트』 1986년 5월호는 15,000명의 사망자가 집단 매장지에 묻혔다고 보도한 반면,30 같은 해 11월 15일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브다』는 4호 원자로가 확실하게 매장되었다고 알려진 시점까지 31명이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다.31 이 수치는 발전소 직원들과 소방관들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고, 수많은 해체 작업자와 일반 주민, 특히 어린이들의 죽음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다.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장으로 국정 최고 책임자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yov)는, 2011년 3월에 체르노빌 사고 25주년을 맞아 기고한 글에서 희생자 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수치를 제시했다. “약 50명 정도의 근로자가 불길과 원자로 노심 용해에 맞서 싸우다가 사망했으며, 그 외에 4천 명 혹은 그 이상의 사람이 결국 방사능물질 누출로 인해 사망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사고 당시 발전소 안 방사선 수치는 시간당 2만 뢴트겐이 넘었던 것으로 측정되었는데, 이는 치사량의 40배가 넘는다. 그리고 세계보건기구(WHO)는 237명의 근로자가 급성 방사성병에32 걸린 것으로 판정했다.”33 2006년 그린피스는 체르노빌 사건으로 인한 사망자는 93,000명이고 질병으로 고통 받는 피해자는 220,000명이라고 보고했다.

발전소 직원들

원자로 폭발의 첫 희생자는 발전소 근무자들이었다. 발레리 호뎀축은 무너지고 있던 건물 더미에 깔려 압사했고, 그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했다. 블라디미르 샤셰녹도 중화상과 골절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새벽 여섯 시에 사망했다.34 25~26일의 당직 기술자로 실험을 위한 버튼을 눌렀던 레오니드 톱투노프는 5월 14일에 사망했다. 그는 스물여섯 살 난 젊은이였는데, 사고 원자로의 기술적 결함을 무시하고 실험 강행 결정을 내린 발전소 지도부의 명령을 따랐다고 지목되기도 했다.35 소련이라는 거대한 구조물의 붕괴를 가져오기 시작한 그 치명적 폭발이 앳된 용모를 가지고 있던 이 젊은이의 기기 조작 잘못 때문인지, 그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다. 어쨌든 그는 사고의 확산을 막으려 현장에서 노력하다 목숨을 잃었다.

작업반장 알렉산드르 아키모프도 가장 먼저 사망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그의 부인은 5월 11일 모스크바 원자력병원의 특별병실에서 죽음을 맞았던 남편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온몸이 그야말로 숯덩이가 되었어요. 남편은 눈을 뜬 채 죽었습니다. 남편도, 남편의 동료 직원들도 모두 같은 생각으로 괴로워했어요. ‘무엇 때문인가?’라는 물음말입니다.”36 차석 엔지니어 아나톨리 시트니코프는 원자로를 직접 들여다보면서 점검하고 이것이 파괴되었음을 확인하여 알린 뒤37 역시 방사선 피폭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대부분의 당직 근무자들은 사고를 국지화시키기 위해 몸을 돌보지 않은 채 사투를 벌였고, 상당수가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떴다.

진화 작업자들, 해체 작업자들

발전소 담당 소방관들은 사고의 확산을 막은 으뜸가는 공로자였다. 사건의 진상을 알지 못한 채 일반적 화재가 일어났다고만 여겼던 이들은 방호복도 없이 진화 작업에 임했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방사선에 노출되었다 5월 19일 소련 정부 기관지 『이즈베스치야』는 여섯 명의 소방관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첫 출동 팀의 지휘관이었던 프라빅 중위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온몸은 화상을 입어 부풀어 올랐고 피부조직은 와해되었다. 그와 동료들은 혈액 형성을 위해 골수이식 수술을 받고 태반 추출물까지 제공받았지만 죽음을 이기지 못했다.38

모래나 납, 자갈이 든 가방을 원자로에 투하하기 위해 헬리콥터를 몰았던 조종사들도 방사선에 노출되었다. 헬리콥터 문을 열고 원자로에 모래주머니를 던져넣으면, 원자로에서는 방사성 재가 일면서 우라늄, 플루토늄 입자들이 날아올라 헬리콥터에 탄 사람들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조종사 중 한 사람으로 120회 비행하고 200~300톤의 냉각재를 투하했던 보돌라즈스키 대령의 죽음 역시 영웅적인 것이라 할 만했다.39

사고 이후 심하게 방사선에 노출된 또 한 그룹이 있었으니, 그들은 ‘해체 작업자(ликвидаторы, liquidators)’들이다. 발전소에 인접한 프리퍄트의 주민이 소개된 직후 원자로를 중심으로 반경 30킬로미터 범위 내의 지역이 접근금지 구역으로 선포되었다. 지금은 그냥 ‘구역’이라고도 불리는 이 금지 구역에서는 방사선 오염 건물의 해체 및 토양의 오염 제거 작업이 진행되었다. 파괴된 4호 원자로를 파묻는 작업 같은 것은 독일에서 도입한 로봇이 수행했다. 그러나 일반 건물, 도로, 숲, 농토, 강과 호수 등의 방사성물질 오염은 사람의 손을 빌려 제거했다. 해체 작업자들은 ‘구역’ 안에서 일했는데, 15일 밤낮을 일한 뒤 15일 동안은 대기소에서 휴식했다. 그들은 원자로 지붕을 걷어내고 들판의 흙을 교체하고 도로와 건물을 일일이 씻어냈으며 강과 지하수의 오염 방지를 위해 차단벽을 설치했다.40

수십만 명의 군인과41 각지에서 몰려든 자원자들이 이 작업을 수행했다. 그들은 방사선 피폭 위험성에 대한 경고도 제대로 듣지 못한 채 중노동에 투입되었다. 그들의 열성적인 작업 덕에 방사성물질 전파를 최소화시킬 수 있었지만, 이는 수많은 작업 종사자들이 방사성물질 오염으로 고통 받다 사망하고 자녀들까지 방사선에 피폭되는 결과를 낳았다. 체르노빌 사건으로 고통 받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은 알렉시에비치의 인터뷰 모음집에는 해체 작업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벨라루스에서 ‘체르노빌 지킴이(Щит Чернобылю)’라는 단체의 부대표로 있는 소볼례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금 야로슈크 대령이 죽어가고 있소. 화학자이자 방사선 산량 기사였소. 건장한 남자였는데 전신이 마비됐소. (…) 그는 구역을 걸어서 돌아다니며 방사선량 경계를 표시했소. 그러니까 사람을 완전히 생체 로봇 취급한 것이오.”42

프리퍄트 사람들, 고멜 사람들,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
발전소가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라는 이름을 가지기는 했지만, 체르노빌시市는 발전소와는 거리상으로나 기능상으로나 좀 떨어져 있었다. 사실 4호 원자로와 운명을 함께한 도시는 프리퍄트였다. 이곳은 발전소 직원과 가족들을 위한 거주지로 1972년 4월에 세워진 아담한 계획도시였다. 발전소에 아주 인접한 곳(2킬로미터 떨어짐)에 위치했으며, 사고 당시 인구는 약 4만 9천 명이었다. 각종 지원시설을 갖춘 깨끗한 도시여서 교육받은 젊은 전문직 종사자들이 이곳을 선호했다. 주민의 평균 연령은 26세였고 해마다 천 명 이상의 아기가 태어났다. 한마디로 활기 넘치고 생활수준도 높은 편이며 주민들의 만족도가 높은 도시였다.43

그러나 체르노빌 발전소의 사고가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프리퍄트시와 인근 마을들에서는 4월 27일 오후 2시부터 주민들의 전면 소개疏開가 실시되었다.44 주민들은 사흘 뒤에는 돌아온다는 당국의 말에 따라 신분증과 약간의 돈 같은 물품만을 챙겨 대형버스에 올랐으나, 이 길은 곧 그들의 고향, 집, 정든 마을과의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45

프리퍄트 주민 소개 이후 ‘구역’에서는 해체 작업이 진행되었고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옛 고향을 잊지 못하는 노인들, 세상을 등진 은자들은 언제부터인가 하나둘씩 다시 금지 구역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46

핵연료 입자, 연무질, 가스 형태를 띤 방사능 핵종들이 바람을 타고 퍼져 나감에 따라 주변 지역 주민들도 곧 피해를 입기 시작했다. 사고 이후 얼마 안 되어 소련과 다른 여러 나라의 토양 오염도 조사가 실시되었다. 방사선 오염을 측정하는 기준 물질로는 세슘-137이 선택되었고, 토양 중 세슘-137 농도가 1Ci/㎢(1제곱미터당 37킬로베크럴) 이상인 곳이 방사선 오염 지역으로 규정되었는데,47 방사선 오염 지역으로 인정되는 지역은 거의 13만 제곱킬로미터라는 엄청난 면적에 이르렀다.48 그런데 소련의 공화국들 중 방사성물질에 가장 심하게 오염된49 지역의 면적이 가장 넓은 곳은 벨라루스였다.50 체르노빌 발전소는 행정적으로 우크라이나에 속하되 벨라루스와의 접경지대에 위치해 있는데, 참사가 났을 때 바람이 사흘 동안 계속 북서쪽으로 불어 벨라루스에 방사성물질을 실어 나른 것이다. 4월 30일부터는 바람이 반대쪽으로 불기 시작했기 때문에 러시아연방 동부 도시들과 우크라이나 도시들도 방사선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발전소와 가까운 벨라루스의 고멜 지역과 모길료프 지역에는 방사성물질이 공기를 통해 빠른 속도로 퍼졌지만,51 당국이 사고의 진상을 은폐했기 때문에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요드 섭취, 토양의 제염 작업, 소개를 비롯한 대책을 마련하기도 어려웠다.52 벨라루스는 원자력발전소가 전혀 없는 곳이었음에도 이 같은 변을 당했다는 점에서 모두에게 생각할 문제를 던져준다.

1995년에도 소련의 세 공화국, 벨라루스, 러시아연방, 우크라이나에서 사회적 보호에 관한 법에 따라 방사선 오염 지역으로 선포된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은 모두 515만 9천 명이었고,53 여러 해에 걸쳐 이주된 주민은 모두 35만 명이었다.54

체르노빌 사고로 인해 방사선에 피폭된 주민, 암, 백혈병, 기형아 탄생 등의 피해를 본 주민의 수는 정확하게 파악하기 불가능하다. 방사선 피폭은 감마선을 직접 쐼으로써 이루어지기도 하고(외폭), 오염된 식품을 섭취하거나 방사성물질을 흡입함으로써 이루어지기도 하는데(내폭),55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다음 행해진 조사에서는 질병의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르노빌 발전소와 가까운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체르노빌 참사 이후 갑상선 질환, 유산, 기형아 발생이 많아지고 각종 암 발생률이 급증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특히 갑상선은 방사선을 집중적으로 흡수하는기관이기에 체르노빌 사건 이후 프리퍄트 주민들을 비롯해 소련 세 공화국의 방사선 오염 지역 주민들에 대한 갑상선의 방사선 수치 측정은 대규모로 자주 실시되었고, 심각한 문제가 드러났다. 또한 21세기 초 현재 벨라루스인 10만 명 가운데 6천 명이 암 환자라는 보고도 있다(체르노빌 이전에는 10만 명당 82명).56

그중에서도 어린이의 고통은 더욱 크고 심하다. 특히 어린이 갑상선암이 급증했다. 1987년부터 1995년까지 갑상선암 진단을 받은 벨라루스 어린이는 확인된 것만으로도 424명인데, 체르노빌 사건 이전에 10만 명당 0.2명이던 수치가 10만 명당 4명으로 증가한 것이다. 갓난아기부터 네 살까지의 어린이가 가장 발병율이 높았다.57 다른 암까지 합치면 어린이 암 환자 수는 훨씬 더 많아진다. 암 이외에도 방사선 오염 지역 어린이들은 전국 평균보다 훨씬 높은 비율로 스트레스, 위장병, 내분비선 질환, 빈혈, 신경계 질환, 호흡기 질환과 같은 각종 질환에 시달렸다.58 유니세프는 1990년에서 1994년 사이 벨라루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건강검진을 실시하여 다음과 같은 질병의 증가율을 확인했다. 신경체계 교란 43%, 심장 혈관 질환 43%, 소화기 질환 28%, 뼈, 근육, 연골 이상 62%, 당뇨 28% 등.59 어린이 피부병, 정신질환도 심각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어린이의 고통은 단순한 수치 이상의 차원과 의미를 가진다. 어린이의 고통은 인류의 미래가 고통스럽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벨라루스에서는 출산율이 낮아지고(1988년에 천 명당 16.1명에서 1996년에는 천 명당 9.3명), 유아사망률이 높아졌으며(1991년에 천 명당 12.05명, 1995년에 천 명당 13.3명), 1993년부터는 인구 감소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환경과 자연의 파괴

체르노빌 사고로 인한 방사성물질의 직접적 누출은 열흘 동안 계속되었다.61 이는 소련과 유럽 지역 일대에 광범한 환경 손상을 가져왔다. 대기와 토양, 식수가 방사선에 오염되었고, 동식물이 방사능 물질에 피폭되었으며, 이 때문에 인간은 식수와 식품 오염이라는 면에서도 심각한 불안감을 안게 되었다.

사고 이후 소련의 광범한 지역에서 쇠고기를 비롯한 육류, 곡류, 감자 등 주요 식품의 방사성물질 오염이 확인되었는데,62 유럽 국가들에서까지 특히 큰 우려를 불러일으킨 것은 우유의 오염이었다. 우유의 오염은 방사성 요드-131의 작용으로 일어났다. 원자로에서 누출된 방사성 요드는 식물 표면에 들러붙었다가 이를 뜯어먹은 소의 내부로 들어가 전량이 소의 창자에 흡수된 뒤 하루가 안 되어 소의 갑상선과 우유 속으로 퍼졌다. 소련 남부, 독일, 프랑스, 남부 유럽에서는 젖소들이 이른 봄부터 방목되고 있었기에 체르노빌 사건 이후 방사선에 오염된 풀을 뜯어먹게 되었다. 1986년 4월 말과 5월에 소련과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는 우유 속 방사성 요드 함량이 엄청나게 치솟았다.63

체르노빌 사고는 또 숲의 방사선 오염을 초래했다. 바람과 비가 전파한 방사성물질로 소련의 여러 지역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스웨덴의 숲도 오염되었다.64 방사선에 특히 민감한 소나무의 피해가 아주 커서, 나무들이 기형적 형상을 띠거나 집단 고사했고, 체르노빌 발전소에서 7킬로미터에 이르기까지 소나무가 붉은 색으로 변하며 말라죽어 이 지대 숲에는 ‘붉은 숲’이라는 별명이 붙었다.65 숲의 식물 중에서 특히 버섯과 딸기가 방사성물질을 받아들여 쌓아두는 경향이 강한데, 이 식물들이 방사성 세슘으로 오염되자 이를 먹고 사는 사슴 같은 동물들도 심각하게 피폭되었다. 스웨덴의 숲에 사는 엘크를 비롯한 사슴들에게서도 허용치를 크게 넘는 방사성물질 수치가 측정되었다. 사고 1년 뒤에는 숲의 흙이 방사성 세슘의 주된 저장고 역할

을 하게 되었다.66 알렉시예비치의 인터뷰집 󰡔체르노빌의 목소리󰡕에는 이런 대화가 나온다. “설탕 사려 줄서 있다가 들은 이야기에요. ‘아이고 세상에, 올해는 버섯이 얼마나 많은지. 버섯도 딸기도 마치 누가 심은 것처럼 많이 났더라고.’ ‘오염된 거라 먹으면 안 돼.’ ‘이 뚱딴지야. 누가 너보고 먹으래? 따와서 말린 다음, 민스크 시장에 갖다 팔면 되지. 백만장자가 될 걸.”67

사고 이후 강과 호수가 오염되자 물고기와 다양한 수중생물들도 오염되었고,68 지하수가 오염되었으며,69 흑해를 비롯한 해양도 높은 방사선 수치를 드러냈다.70 3천 2백만 인구의 식수원인 드니프로(드네프르)강으로 흘러드는 지류들이 방사성물질에 오염되었으니 심각한 문제였다.

역설적인 면도 없지 않다. 처음에는 반경 30킬로미터 금지 구역 안에 주인 잃은 애완동물과 가축들이 떠돌아다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늑대, 멧돼지, 독수리, 사슴, 토끼, 해리 등 야생동물 개체수가 크게 늘어났다. 현재 이곳에는 동물들이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은 채 돌아다닌다. 국제원자력기구 보고서도 이를 두고 “인간이 사라진 곳에서 자연이 번성한다”고 했다.71 그러나 이러한 야생의 귀환은 이에 선행한 뭇 생명의 죽음과 질병, 기형화 위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대응과 논쟁

소련 정부는 체르노빌 사건 직후 일반 국민과 전 세계를 향해 사고의 진상을 정직하게 밝히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체르노빌 사건에서는 투명성과 정보가 가장 중요한 쟁점으로 등장하게 된다.72

사고가 처음 외부 세계에 알려진 것은 4월 28일 아침 스웨덴에서였다. 체르노빌에서 북서쪽으로 1,000킬로미터 떨어진 포르스마르크 원자력발전소 근무자들의 출근 복장 검사에서 허용 한도 이상의 방사성물질이 검출되어 비상이 걸렸다. 곧 핀란드, 노르웨이, 덴마크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자국 원자력발전소의 안전검사에서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북유럽 국가의 원전 관계자들은 소련에 사고 여부를 문의했다. 모스크바의 당국자들은 완강하게 부정하다가 4월 28일 밤 9시에야 방송을 통해 체르노빌 원자로가 손상되었으며 정부의 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짤막한 발표로는 사고 규모와 진상을 파악할 수 없었다.73

심지어 핵에너지 정책 최고 담당자들은 사고를 정당화하는 태도까지 보였다. 소련 핵에너지 사용 국가위원회 의장이었던 페트로샨츠가 과학은 희생자를 요구한다고 말하여74 공분을 산 것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소련 당국은 피해 규모와 방사선 오염 정도를 축소 발표했다. 또한 사소한 물질적 보상을 내걸고 애국심과 희생정신에 호소하여 수많은 해체 작업자들을 동원하고, 그들을 극도로 위험한 작업에 무방비로 종사케 한 뒤 방치했다. 정부는 이들과 자녀들을 비롯해서 방사성 질환에 걸린 수많은 사람들의 질병 원인이 체르노빌 사건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소련 정부의 경직된 태도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에 불을 붙였으니,75 체르노빌 사태야말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독립을 요구하고 나서는 데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사실 체르노빌 문제에 관한 대책, 보상, 대안적 에너지 정책 등과 관련해서는 소련 해체 이후 독립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정부의 태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소련과 구소련권 국가들은 체르노빌 이후에도 원전 정책을 재검토하지 않았고, 전력 생산을 원자력발전에 의존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체르노빌 사고 10주년을 맞아 벌어진 탈핵운동가들의 시위를 봉쇄하고 활동가들을 투옥하는가 하면,76 심지어 4호 원자로의 사고 이후에도 체르노빌 발전소를 폐쇄하지 않고 다른 원자로를 계속 작동시켰다. 이 발전소는 1990년대에도 몇 차례 사고를 기록했으며 2000년에 들어서야 가동을 완전히 중단했다.77

다른 한편, 유럽 국가들은 물론 미국과 일본에까지 방사성물질이 날아가면서 체르노빌 사고는 각국 정부와 일반인을 가리지 않고 세계적인 관심을 집중시켰다. 미국의 일부 언론은 소련에서 이런 일이 터진 것을 두고, “러시아인들이 자기 파괴를 시작했다. 이는 좋은 소식이다”라며 고소해 하는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지만,78 체르노빌 발전소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유럽 사회는 공포 분위기에 빠졌다.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의 새로운 정책 노선 아래서 정보공개를 지향하기 시작한 소련 사회는 외부 조사단의 현장시찰과 조사도 조금씩 허용하기 시작했고, 사고의 진상과 원인에 대한 논의도 차츰 활발해졌다.

사고 원인에 대한 논의는 초기에는 이것이 부주의에서 비롯된 실수인가, 원자로 설계 오류인가에 대한 논쟁으로 집약되었다. 담당자의 실책을 비판할 때는 핵에너지 정책 최고 결정권자들, 발전소 최고 관리자들, 4월 25~ 26일 당일 실험의 직접적 담당자 등 각 층위 인물들의 책임에 대한 개별적 논의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리 메드베데프는 소련 핵에너지 정책 담당자들과 발전소 지도부의 무책임성을 중시하면서79 이 같은 사태에 이르게 한 관련자들의 안전 불감증은 “침묵의 공모”였다고 강조한 반면,80 다른 논자들은 실험의 직접 담당자들이 안전 지침과 위험 경고 신호를 무시하고 실험을 무리하게 진행한 것이 화근이었음을 지적했다.81 1986년에 국제원자력기구 국제핵안전그룹의 전문가들이 펴낸 초기 보고서도 기기 조작자가 실험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강박감, 원자로에 대한 지식 부족, 위험감각 상실로 인해 일련의 기술적 안전조치를 무시한 것이 사고 원인이라고 지적했다.82 첫 보고서를 수정한 1992년의 보고서 서문에서 당시 국제원자력기구 사무총장 한스 블릭스도 기본적으로는 기기 조작자의 연수 부족, 원자로 설계자, 기술 전문가, 제조자, 건설자, 조작자, 조정자 사이의 소통 부족이 원인이라는 견해를 견지했다.83

이에 반해 발전소 간부였던 댜틀로프는 설계 오류로 인한 원자로 구조상의 결함을 강조하면서, 결코 작동자의 실수가 아니라고 주장했다.84 서방의 핵에너지 전문가들은 체르노빌형 원자로의 작동 방식상 결함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져왔다고 지적했다. 쓰리마일섬 발전소의 원자로는 격납용기 안에 들어 있었던 반면 체르노빌 원자로에는 이 같은 용기가 없었기에 사고의 규모가 큰 차를 보이게 되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 또한 원자로 자체의 디자인 혹은 외적 결함을 부각시키는 논의와 일정하게 관련되어 있다.85 러시아 방사능 의학계를 대표하는 인물의 한 사람인 레오니드 일리인도 결국 노심을 통과하는 물의 양에 대한 반응성이 여타 원자로와 다르게 되어 있는 RBMK형 원자로의 결함이 사고를 초래했다는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86 그리고리 메드베데프도 VVER와 같은 경수로輕水爐형보다 RBMK형 우라늄 흑연 원자로가 더 위험하다는 점을 지적했다.87

그러나 조작상의 사소한 실수나 설계상의 이러저러한 결함이 인간과 자연에 그토록 광범하고도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는 어떤 도구가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도구의 존재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의문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핵 관련 사고는 피해의 규모와 지속성, 자연과 뭇 생명에 미치는 악영향, 유전자 변형으로 미래 세대에게까지 끼치는 고통의 차원이 다른 사고와 비교되지 않는다.

체르노빌 사고의 원인에 대한 명확하고 단일한 대답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는 사고 원인에 대한 논쟁이 기술적인 문제에 대한 토론을 넘어서서 원자력발전 자체의 존재 합리성에 대한 성찰로 이어졌고, 이를 계기로 원자력발전의 존폐 문제에 대한 치열한 논란이 일어났다. 독일을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에서는 핵 없는 사회를 지향하는 녹색당운동이 더욱 큰 힘을 받게 되었고, 원자력발전의 대안으로 대안-재생에너지를 활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2012년 한국을 방문한 독일 녹색당 소속 국회의원 질비아 코팅-울은 자신이 전업주부로 지내다가 체르노빌 사건을 계기로 녹색당에 가입하여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그 후 당의 원자력위원회 대변인으로 활동하면서 재생에너지 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88

이처럼 체르노빌 사건은 시민들의 자발적 반反원전운동과 녹색당운동이 서로 자극을 주고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전환점이 되었다. 당사자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같은 구소련권 국가들에서도 생태주의적 담론이 일어나고 탈핵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89

고르바초프는 체르노빌 25주년을 맞아 특별기고한 글에서 핵 없는 세계를 향한 그의 바람을 강조했다. “체르노빌 사고가 되풀이될 그 어떤 가능성도 반드시 막아야 한다. 체르노빌 사건은 그 직접적인 인간적 희생, 오염된 광대한 토양, 이주당한 주민의 수, 가축의 막대한 손실, 정든 집과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재산을 강제로 빼앗겨버린 개개인들이 겪은 장기적 트라우마를 생각해볼 때 어마어마한 재앙이었다. 이 비극의 희생자들은 그들이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맞서 싸울 수도 없는 그러한 위기에 부딪쳤던 것이다. 체르노빌로 인해 초래된 물질적 손해가 아무리 막대하다 해도, 아직도 치러지고 있는 인간적 대가에 비하면 의미가 희석될 정도다. 이 비극의 진정한 범위는 아직 다 파악되지 못하고 있으며 핵 위협의 현실을 여전히 충격적으로 상기시켜준다. 이는 또한 현대 기술의 위험을 보여주는 두드러진 상징이기도 하다.”90

무엇을 배울 것인가

체르노빌 사고는 후쿠시마 이전 최대의 원자력발전 사고였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을 때보다 열 배 더 많은 방사성물질이 퍼졌고, 여기에 플루토늄 0.5톤까지 누출되었다.91 그런데 이런 재앙이 있은 뒤에도 사람들이 원전 사고로부터 배우는 속도는 결코 빠르지 않았다. 원전 찬성론자들은 원전 사고에 대해 항상 디자인상의 결함 같은 해당 원자로의 특수성 때문이었다고 여기거나, 막을 수 있는 인재였다고 주장했다.

체르노빌식의 사고와 진상 은폐는 소련 같은 경직된 체제 아래서나 일어난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소위 민주적인 체제와 잘 기능하는 정부를 가진 듯 보이던 일본에서는 달랐던가?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 후 대처는 더 기민했고 진상은 더 잘 밝혀졌던가? 그렇지 않다. 체르노빌 사고 당시 진상규명과 관련하여 혼선이 빚어졌고, 진상 은폐 시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쨌건 소련 정부는 사고 직후인 26일 아침에 중앙정부 책임자들을 모스크바에서 체르노빌로 파견했고, 이들은 현지에서 방사성물질을 마셔가면서 진상 파악과 대책 마련을 위해 전력투구했다. 또한 소련은 전체를 위해 개인은 스스로를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던 사회였다. 이러한 가르침을 체화하고 있던 발전소 직원들, 소방관들, 군인들, 해체 작업자들은 위험의 확산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일례로 고도로 오염된 물속에 잠수하여 배수 밸브를 열어 물을 빼낸 잠수 작업자들은 온 유럽을 지하수의 방사성물질 오염으로부터 구해냈다고 평가받는다.92 물론 이들에 대한 국가적 보상은 어이없도록 알량했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지만, 어떤 사람들의 “영웅적 죽음”이 사고의 전 유럽화를 막아냈다.

그런데 대지진 이후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원자로들이 연쇄 고장을 일으킨 일본에서야말로 도쿄전력 직원들의 고독한 사후 처리 작업을 제외하고는 진상규명 노력이나 대처가 더 미진했다. 일본도 소련 못지않게 원자력 안전신화가 만연해 있던 사회였고, 특히 지진에 대비해서 만전을 기했다고 자부하던 사회였다. 그러나 사건 이후 대응은 과연 이에 부합했다고 할 수 있을까?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는 원자로 네 기(1~4호기)가 노심 용해, 수소폭발 등의 사고를 일으켰으며, 이들 원자로는 격납용기에 싸여 있었지만 격벽까지 뚫는 폭발이 일어나 사고 후 2년이 지난 지금도 현장에서 방사성물질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방사성 물질을 포함한 오염수는 계속 늘어나고 있지만 저장할 공간이 없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93 그렇다면 문제는 체제의 민주성이나 효율성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원전 사고는 체제를 가리지 않는 것이고, 원전은 인간에게 어울리지 않는 기술인 것이다.

체르노빌 사고는 근대 기술문명 자체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낳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1984년 인도 보팔에서 일어난 유독가스 폭발 사고로 수천 명이 사망한 사건이 있은 지 2년 만에 체르노빌 사고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근대문명을 ‘위험사회’로 특징지었다. 이 사회는 유독가스, 방사성물질 등이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전파되어 불특정 다수의 인간을 무차별적으로 죽음과 불치병으로 몰아넣고, 자연과 환경을 파괴하는 사회이다. 벡은 이 현상 속에서 근대문명 자체의 위험을 보았다. 그는 문명발전이 초래한 위험의 불특정성, 무차별성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한 모든 고통, 곤궁, 폭력은 지금까지 ‘타자’라는 범주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유대인, 흑인, 여성, 난민, 반체제 인사, 공산주의자 등이 이 같은 타자였다. 한쪽에는 울타리, 수용소, 도시 구역, 군사 구역이 있었고 다른 쪽에는 자신들의 네모난 벽이 있었다. 이 벽은 실제적 혹은 상징적 경계로서 겉으로 보아 ‘해당 없는 사람들’은 이 뒤로 물러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제 체르노빌 사태 이후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타자’의 종말이요, 우리가 애지중지해왔던 일체의 ‘거리두기 가능성’의 종말을 의미한다. 이는 핵 오염을 통해 실제로 겪을 수 있는 일이 되었다. 곤궁에는 경계를 지을 수 있으나 핵 시대의 위험에는 경계를 지을 수가 없다.”94 위험사회론은 그것이 등장한 이후 적어도 동아시아에서는 교양계층 사이에서 멋있는 최신 담론의 하나로 소비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원전 사고의 무차별성은 멋진 담론의 수준을 넘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한다.

인간의 역사를 아우슈비츠 이전과 아우슈비츠 이후로 나누어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류 역사를 체르노빌 이전과 체르노빌 이후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도 가능하다. 제노사이드는 인간이 의도적·체계적으로 행하는 반인륜 범죄이다. 체르노빌 사고와 같은 원전 사고는 물론 이 같은 의도적 범죄와는 다르다. 그러나 이런 사고를 두고 고의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체르노빌 사건을 직접 목격하거나 이로 인해 고통 받고 죽어간 이들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이것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진짜 전쟁, “핵전쟁이었다”고.95 소련 국방부 화학부대 사령관이었던 블라디미르 피칼로프 장군 또한 체르노빌 사건에서 “핵 발전소를 타격한 핵무기의 폭발”과 핵전쟁을 상기시키면서 체르노빌 재앙은 “다소 완화된 형태의 저강도 핵폭발”에 해당한다고 평가했다.96

체르노빌의 인질, 숨겨진 유산 키예프에 위치한 우크라이나 국립 체르노빌박물관에 전시된 사진이다.
1987~1988년 사이에 태어난 이 아이들은 해체 작업자들 혹은 프리퍄트 인근 지역에서 대피한 이들의
아들딸이다. 그들 중 일부는 죽고, 일부는 건강의 문제를 겪고 있으며, 그 자녀들에게도 문제가 이어지고
있다.

이 같은 핵전쟁이 초래한 재앙을 온몸으로 막아낸 사람들 덕분에 그 피해가 다소 국지화될 수 있었다고 해서, 그리고 이제 시간이 삼십 년 가까이 흘렀다고 해서, 이 사건을 가벼이 여길 수는 없다. 체르노빌 사고의 희생자들은 어마어마한 고통 속에서 죽어갔거나 아직도 고통을 겪고 있다. 알렉시예비치가 인터뷰한 체르노빌 희생자의 가족들은 고통 속에서도 유난히 자주 ‘이 고통의 의미’에 대해 말했다. “의미 없이 이러한 고통을 받을 수는 없다”, “이 고통의 의미가 무엇인가”라고.97 사고 후에 태어난 기형아들, 방사선 노출로 고통 받는 어린이 환자들의 고통에 대해서도 무엇 때문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리 메드베데프는 사건 초기의 희생자들이 비록 수는 많지 않을지라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수백만 명의 고통에 해당하는 고통을 겪다 갔다고 묘사했다. 그리고 그들은 순교자라고 했다.98 다른 무수한 사람들이 겪어야 할 고통을 그들이 대신 겪었으니, 이제 다시는 원전 사고로 인한 피해자는 없어야 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그들 고통의 의미였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론이 등장하고 확산되기 시작하던 시절, 그 지지자들은 “핵에너지는 새롭고 엄청난 전력원이며 더 나은 삶을 위한 도구”라고 찬양했다.99 인류의 일부 구성원들은 체르노빌을 겪고도 핵에너지에 대해 낙관적 태도를 버리지 못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체르노빌 사고 이후 원자력발전소를 추가 건설했다. 서방 국가들은 돈을 제공할 테니 원전을 더 지으라고 우크라이나 정부에 요구했고, 러시아도 이를 부추겼다. 소련 시대처럼 우크라이나 정부는 원자력발전으로 생산된 전력의 수출에 계속 집착해왔다.100 후쿠시마를 겪고 나서야 겨우 핵 발전의 치명적 위험에 대한 세계인들의 일반적 경각심이 조금쯤 더 강화된 것 같다. 눈에 드러난 사고가 없어 보이는 원자력발전소도 인간과 뭇 생명의 삶을 위협하고 환경을 파괴한다. 원자로를 식힌 냉각수는 방사선에 오염된 물인데, 이것이 강과 바다로 흘러든다. 핵 재처리 공장이 있는 영국 셀라필드(Sellafield)에서는 이 공장의 노동자들뿐 아니라 인근 주민 사이에서도 높은 암 발병률이 확인되고 있으며, 영국 정부는 이 현상을 핵 재처리 시설과 결부시키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101 체르노빌 같은 사고만 핵 재앙이 아니다. 『체르노빌의 목소리』라는 제목으로 번역된102 알렉시예비치의 책은 원래 『체르노빌의 기도』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에는 ‘미래의 연대기’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체르노빌이 인류의 미래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한정숙

현재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에 재직 중이다. 러시아 역사를 전공했고 최근의 관심 주제는 시베리아, 여성, 우크라이나이다. 최근의 주요 저작으로는 저서인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서양 고전과 역사 속의 여성 주체들』, 『우크라이나의 이해』(공저), 『독일 통일과 여성―젠더 관점에서 조망한 독일의 분단과 재통일』(공저), 『여성주의 고전을 읽는다―계몽주의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두 세기의 사상적 여정』(편저) 등이 있다.

주—————

1 “Forward”, Peaceful Uses of Atomic Energy. Development of International cooperation, Department of State, 1955.

2 Milo D. Nordyke, The Soviet Program for Peaceful Uses of Nuclear Explosion(U.S. Department of Energy: Lawrence Livermore National Library, September 1, 2000), 인터넷 PDF 자료, p. 2. 수소폭탄은 1952년에 미국에서 처음으로 개발되었고, 소련에서는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독자적 방식에 따라 1953년 개발에 성공했으며 소련형 수소폭탄의 정식 실험은 1955년에 이루어졌다.

3 Dwight Eisenhower, “Atoms for Peace”, Address to the 470th Plenary Meeting of the United Nations General Assembly, http://www.iaea.org/About/history_speech.html (검색일: 2013. 3. 14).

4 UN General Assembly Resolution 810(IX), “International co-operation in developing the peaceful uses of atomic energy”(503rd plenary meeting 4 December 1954).

5 Nordyke, The Soviet Program for Peaceful Uses of Nuclear Explosion, p. 1.

6 소련 또한 유엔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으며 덕분에 이 결의문은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Peaceful Uses of Atomic Energy. Development of International cooperation, p. 8.

7 사하로프는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한 뒤 군사적 목적이 아닌 ‘평화적 목적’을 위해 핵융합을 이용하는 데 몰두했다. 그가 스승 이고리 탐과 함께 개발한 토카막(Tokamak)이라는 기구는 이를 위한 것이었다. Andrey Sakharov May 21, 1921~December 14, 1989, http://russiapedia. rt.com/prominent-russians/politics-and-society/andrey-sakharov/ (검색일: 2013. 3. 16).

8 핵폭발을 이용해 토목 건설 공사를 위한 발파작업을 하거나 석유·가스 채취를 촉진하는 사업은 20세기 후반에 미·소 양국에서 여러 차례 실시되었는데, 이는 방사선 누출에 따른 환경오염을 야기했다. Nordyke, The Soviet Program for Peaceful Uses of Nuclear Explosion, pp. 4~8, 70~74.

9 실제로 미·소 양국은 서로 이런 비난을 가했다. 미국에서 핵폭발을 이용한 건설용 발파작업이 진행되던 시절인 1958년, 소련의 관계자는 이것이 실제로는 은폐된 핵무기 실험이라고 강력하게 비난했다. Nordyke, The Soviet Program for Peaceful Uses of Nuclear Explosion, p. 4.

10 서의동, 플루토늄 제조에 집착하는 일본 ‘핵무기 야망’, 󰡔경향신문󰡕 2013. 3. 5. 이 기사도 원자력발전과 핵무기 제조의 관련을 보여준다.

11 Marples, “Introduction”, Grigory Medvedev, No Breaking Room, New York: Basic Books, 1993, pp. 8~9.

12 Ibid, pp. 11~12.

13 이 부분은 체르노빌 사건을 시간순으로 정리한 인터넷 자료를 참조했다. “chronology”, http://pripyat.com/en/chronology.html (검색일: 2012. 9. 29).

14 Grigory Medvedev, The Truth About Chernobyl, Translated from the Russian by E. Rossiter, Basic Books, 1991, p. 207.

15 Zhores Medvedev, Nucleat Disaster in the Urals, Translated by George Suanders, New York: W.W. Norton & Company, 1979, p. 4.

16 Ibid, p. 16.

17 Ibid, p. 4.

18 Grigory Medvedev, The Truth About Chernobyl, p. 18.

19 Zhores Medvedev, Nucleat Disaster in the Urals, pp. 10~13.

20 Grigory Medvedev, The Truth About Chernobyl, pp. 18~19.

21 Richard F. Mould, Chernobyl. The Real Story, Oxford: Pergamon Press, 1988, pp. 1~2.

22 Franz-Josef Bruggemeier, ¨ Tschernobyl, 26. April 1986. Die ¨okologische Herausforderung, Deutscher Taschenbuch Verlag, 1998, p. 12.

23 Mikhail Gorbachev, “Chernobyl 25 years later: Many lessons learned”, Bulletin of the Atomic Scientists, 67, 2011, pp. 77~78, http://bos.sagepub.com/content/67/2/77 (검색일: 2011. 3. 14).

24 Bruggemeier, ¨ Tschernobyl, 26. April 1986, p. 11.

25 Jim T. Smith, Nicholas A. Beresford, Chernobyl―Catastrophe and Consequences, Springer Praxis Books, 2005, p. 2; Bruggemeier, ¨ Tschernobyl, 26. April 1986, p. 13; Mould, Chernobyl. The Real Story, pp. 10~11.

26 Grigory Medvedev, The Truth About Chernobyl, p. 93.

27 Mould, Chernobyl. The Real Story, pp. 16~17; Brüggemeier, Tschernobyl, 26. April 1986, pp. 14~15.

28 Grigory Medvedev, The Truth About Chernobyl, pp. 174~178.

29 Ibid, p. 195.

30 Mould, Chernobyl. The Real Story, p. 14.

31 Ibid, p. 63.

32 환경용어연구회 편, 『환경공학용어사전』, 성안당, 1996은 이 병을 이렇게 설명한다. “인체가 방사선을 전신에 받아 급성 증상을 일으킨 상태로, 일반적으로 받은 선량에 따라 다음과 같은 증상이 나타난다. ① 50R(뢴트겐): 임파구 수의 일시적 감소. ② 150R: 약 반수의 사람이 두통, 구토, 설사 등의 증상을 일으킨다. ③ 200~600R: LD50은 약 400R, 따라서 200R 이상에서 100%의 사람이 증상을 일으키고, 250R 에서 5% 사망, 400R에서 50% 사망, 600R에서 100% 사망한다. 최초의 증상으로 구역질, 무력감이 있고 2~3주간 후에 발열, 탈모, 출혈 증상이 일어나며 혈액 중에 백혈구가 감소하여 약 반수의 사람이 사망한다. 급성기를 지나면 해열해서 회복기에 들어간다. ④ 1,000~수천R: 몇 시간 후 전신 무력감, 고온과 함께 구토, 설사, 출혈이 나타나고 수일부터 2주일 내에 쇠약해져 사망한다. ⑤ 10,000R 이상: 전신경련 등 중추신경 증상을 일으켜 하루 이내에 사망한다. ”http://terms. naver.com/entry.nhn?cid=648&docId=624399&mobile&categoryId=648 (검색일: 2013. 3. 20).

33 Mikhail Gorbachev, “Chernobyl 25 years later: Many lessons learned”.

34 Grigory Medvedev, The Truth About Chernobyl, p. 111, pp. 171~172.

35 Ibid, p. 50; 한 연구자는 이날 실험의 기기 작동자가 안전 절차를 무시한 것은 실험을 완수하고 싶은 욕심과 원자로의 안전에 대한 지나친 낙관 때문이었다고 평한다. Angela Liberatore, The Management of Uncertainty. Learning from Chernobyl, Gordon and Breach Publishers, 1999, p. 66.

36 Grigory Medvedev, The Truth About Chernobyl, p. 254.

37 Ibid, pp. 121~122.

38 Ibid, p. 251.

39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은혜 옮김, 󰡔체르노빌의 목소리―미래의 연대기󰡕, 새잎, 2011, 241쪽. 벨라루스의 체르노빌 피해자, 유족, 목격자, 관련자들과의 인터뷰를 담은 이 책은 국제적으로 큰 호평을 받았다. 비극의 실상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필독서이다. 원제는 󰡔체르노빌의 기도. 미래의 연대기󰡕이다. 이 글에서는 한국어 번역본을 인용하되 원문을 참고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번역문을 약간 수정했다. Светлана Алексивич, Чернобыльская молитва(хроника будущего) http://www.lib.ru/NEWPROZA/ ALEKSIEVICH/chernbyl.txt (검색일: 2013. 3. 25).

40 Mould, Chernobyl. The Real Story, pp. 113~114.

41 알렉시예비치의 인터뷰집에는 해체 작업자들의 수에 대해 80만 명, 34만 명 등 상이한 수치들이 제시되어 있다. 『체르노빌의 목소리―미래의 연대기』, 27쪽, 238쪽.

42 같은 책, 237쪽.

43 체르노빌시는 발전소에서 14킬로미터 떨어져 있었고 사고 당시 인구는 약 14,000명이었다. 프리퍄트시와 체르노빌시는 모두 체르노빌 광역군에 속해 있었는데, 사고 이후 이 광역군은 이반코프 광역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http://pripyat.com/en/pripyat-and-chernobyl.html (검색일: 2012. 9. 29).

44 Mould, Chernobyl. The Real Story, p. 19.

45 Grigory Medvedev, The Truth About Chernobyl, pp. 185~186.

46 유재현, 누구도 편안하게 죽지 못할 것이다 , 󰡔시사IN󰡕 제279호, 2013. 1. 19, 62쪽.

47 Environmental Consequences of the Chernobyl Accident and their Remediation: Twenty Years of Experience. Report of the Chernobyl Forum Expert Group ‘Environment’, IAEA Vienna, 2006, p. 23. 이는 국제원자력기구의 체르노빌 포럼에 참가한 전문가들이 체르노빌 사건 후 20년 되던 해에 내놓은 보고서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이 보고서의 수치를 자주 인용했지만, 이 보고서가 체르노빌 사건으로 인한 피해, 특히 인간의 고통을 축소시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48 В. В. Ломакин, Т. Г. Самхарадзе, “Предисловие”, А. С. Дятлов, Чернобыль. Как это было(체르노빌. 실상은 어떠했던가), p. 4. http://rrc2.narod.ru/book/ (검색일: 2013. 2. 8). 이 책은 체르노빌 사고 당시 발전소 차석 엔지니어였던 댜틀로프가 쓴 것이다.

49 여기서는 제곱미터 당 185킬로베크럴 이상인 곳을 의미한다. 어떤 지역은 제곱미터당 1,480킬로베크럴이라는 엄청난 방사성 세슘 농도를 보이기도 했다.

50 Environmental Consequences of the Chernobyl Accident and their Remediation, p. 23.

51 바람은 4월 27일부터 29일까지 체르노빌에서 고멜 지역과 러시아연방의 브랸스크 지역으로 계속 불었다. Ibid, p. 21.

52 알렉시예비치, 『체르노빌의 목소리―미래의 연대기』, 357~367쪽, 네스테렌코 인터뷰 참조.

53 Environmental Consequences of the Chernobyl Accident and their Remediation, p. 24, 25.

54 Jim T. Smith, Nicholas A. Beresford, Chernobyl―Catastrophe and Consequences, Springer Praxis Books, 2005, p. 6.

55 Environmental Consequences of the Chernobyl Accident and their Remediation, p. 27.

56 알렉시예비치, 『체르노빌의 목소리―미래의 연대기』, 26쪽. 이 주장은 벨라루스의 인터넷 신문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출처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57 Leonid Lomat, Galina Galburt, Michael R. Quastel, Semion Polyakov, Alexey Okeanov, Semion Rozin, “Incidence of Childhood in Belarus Associated with the Chernobyl Accident”, Environmental Health Perspectives, Vol. 105, Supplement 6: Radiation and Human Health, Dec. 1997, p. 1529, 1531.

58 Ibid, p. 1531.

59 “The Effects of the Accident on Human Health: The full extent of the effects of the Chernobyl accident on human health is difficult to assess and remains controversial”, http://www.chernobyl-children.org.uk/information/the-chernobyl-disaster/the-effects-of-the-accident-on-human-health (검색일: 2013. 3. 20).

60 Lomat, Galburt, Quastel, Polyakov, Okeanov, Semion Rozin, “Incidence of Childhood in Belarus Associated with the Chernobyl Accident”, p. 1529.

61 Environmental Consequences of the Chernobyl Accident and their Remediation, p. 18.

62 Ibid, pp. 34~39쪽. 세슘-137로 인해 시금치를 비롯한 잎채소와 과일도 오염되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야외에서 재배한 일체의 잎채소를 먹지 못하게 했고, 이탈리아 정부도 한동안 잎채소의 판매를 금지했다. Mould, Chernobyl. The Real Story, p. 129.

63 Environmental Consequences of the Chernobyl Accident and their Remediation, p. 30.

64 Ibid, p. 42.

65 Ibid, p. 129.

66 Ibid, p. 43.

67 알렉시예비치, 『체르노빌의 목소리―미래의 연대기』, 195쪽.

68 Environmental Consequences of the Chernobyl Accident and their Remediation, pp. 48~55.

69 Ibid, pp. 56~60.

70 Ibid, pp. 55~56.

71 Ibid, p. 136.

72 Liberatore, The Management of Uncertainty. Learning from Chernobyl, p. 63.

73 Bruggemeier, ¨ Tschernobyl, 26. April 1986, pp. 16~17.

74 Grigory Medvedev, The Truth About Chernobyl, p. 5, 205.

75 제인 도슨은 체르노빌 사건 이후 1980년대 후반에 구소련권 공화국들에서 일어난 원전 반대 움직임을 ‘생태민족주의’라 이름 짓고, 이것은 생태주의적 반핵운동 자체였다기보다 반소, 반모스크바 성격의 운동이었으며, 민족주의의 대체물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평가했다. Jane I. Dawson, “Anti nuclear activism in the USSR and its successor states: A surrogate for nationalism?”, Environmental Politics, 4:3, 1995, 443쪽.

76 Renfrey Clarke, “Ukrainian authorities jail anti-nuclear protesters”, Green Left, May 15, 1996, http://www.greenleft.org.au/node/11857 (검색일 2013. 3. 12).

77 유재현, 체르노빌 재앙 후에도 원자로는 계속 돈다 , 『시사IN』 제278호, 2013. 1. 12, 60~62쪽.

78 Detroit Medical News 1986년 5월 12일자 사설이 이렇게 시작했다. Mould, Chernobyl: The Real Story, p. 14.

79 Grigory Medvedev, The Truth About Chernobyl, pp. 36~49.

80 Ibid, p. 39.

81 Smith, Beresford, Chernobyl―Catastrophe and Consequences, p. 2; Liberatore, The Management of Uncertainty. Learning from Chernobyl, p. 66; Bruggemeier, ¨ Tschernobyl, 26. April 1986. Die ökologische Herausforderung, pp. 26~27.

82 “Информация об аварии на Чернобыльской АЭС и ее последствиях подготовленная для МАГАТЭ”, Атомная энергия, т. 61 вып. 5 ноябрь 1986, pp. 311~312. http://accidont.ru/expert.html (검색일: 2013. 3. 11).

83 “Foreword by the Director General”(Hans Blix), INSAG-7, The Chernobyl Accident: Updating of INSAG-1 : A Reprot by the International Nuclear Safety Advisory Group, Vienna: 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 1992, http://www-pub.iaea.org/MTCD/publications/PDF/Pub913e_web.pdf (검색일: 2013. 3. 11).

84 “Предисловие”, А. С. Дятлов, Чернобыль. Как это было.

85 John F. Ahearne, “Nuclear Power after Chernobyl”, Science, New Series, Vol. 236, No. 4802, May 8, 1987, pp. 673~674.86 “Предисловие”, А. С. Дятлов, Чернобыль. Как это было.

87 Grigory Medvedev, The Truth About Chernobyl, p. 62.

88 질비아 코팅-울, 핵 없는 세계와 여성의 삶 , 『핵 없는 세계와 동북아시아 여성의 삶』(2012 동북아 여성 평화회의 발표문집), 2012, 29~55쪽.

89 구소련권의 탈핵운동은 체르노빌 사고 이후 페레스트로이카 기간 중이었던 1989년대 후반에 가장 활발했으며 그 이후 크게 약화되었다는 평을 받는다. Dawson, “Anti nuclear activism in the USSR and its successor states: A surrogate for nationalism?”, p. 442. 그러나 현재도 러시아에서는 생태보호(에코자쉬타), 생태페레스트로이카, 자연과 청년 등 여러 탈핵단체가 활동하고 있다. ‘생태보호’는 1989년에 창설되었으며 모스크바 본부와 여러 지부가 있다. “Anti-nuclear Movement in Russia”, http://www.nuclear-heritage.net/in-dex.php/Anti-nuclear_Movement_in_Russia (검색일: 2013. 4. 20).

90 Gorbachev, “Chernobyl 25 years later: Many lessons learned”.

91 Grigory Medvedev, The Truth About Chernobyl, p. 224.

92 알렉시예비치, 『체르노빌의 목소리―미래의 연대기』, 239쪽.

93 서의동, 후쿠시마 원전엔 아직도 치명적 방사성물질 , 『경향신문』 2013. 3. 5.

94 Ulrich Beck, Risikogesellschaft. Essays und Analysen,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91, p. 7.

95 알렉시예비치, 『체르노빌의 목소리―미래의 연대기』, 242쪽; Grigory Medvedev, The Truth About Chernobyl, p. 190.

96 Mould, Chernobyl. The Real Story, p. 93.

97 알렉시예비치, 『체르노빌의 목소리―미래의 연대기』, 295, 300, 406쪽.

98 Grigory Medvedev, The Truth About Chernobyl, p. 261.

99 “Forward”, Peaceful Uses of Atomic Energy. Development of International cooperation.

100 유재현, 체르노빌 재앙 후에도 원자로는 계속 돈다 , 60~62쪽; Bruggemeier, ¨ Tschernobyl, 26. April 1986. Die ¨okologische Herausforderung, pp. 28~29.

101 Stephanie Cooke, In Mortal Hands: A Cautionary History of the Nuclear Age, New York: Bloomsbury, 2009, pp. 356~357.

102 영역본 제목도 ‘Voices From Chernobyl’이다.

■ 체르노빌 원전 사고 ― 20세기가 보내온 생명 파괴의 경고
Chernobyl Nuclear Disaster in the 20th Century: a waning against the abuse of life
(pp. 199~232)

한정숙 Hahn, Jeong Sook

This paper surveys the Chernobyl nuclear accident on 26th April 1986, and reconsiders the effect and impact of the catastrophe. It examines in turn the conceptof “peaceful uses of atomic energy” which has served as the theoretical backbone for the construction of nuclear power plants during the Cold War period, transformations of Soviet energy policy, nuclear accidents in the Soviet Union before Chernobyl, the aftermath of the Chernobyl accident, its victims and destruction of nature, governmental management of the crisis and the lessons learned.
During the 1960’s~70’s, the Soviet Union, one of the leaders in the development of atomic power, was forced to reexamine its energy policy that was on traditional energy resources such as gas and coal and began an intense program of nuclear power plant construction. Though some nuclear accidents occurred, these did not deter the Soviet government from continuing to promote its message of safe nuclear energy. In Ukraine, where nuclear power plants were particularly abundant, the Chernobyl tragedy happened with the most appalling psychological affects on humans and the environment.
As to the causes of the Chernobyl accident, the explanation stressing the errors and mistakes of the power plant operators contrasted with the view that put the main blame on deficiencies on the construction design of the reactor. When one considered the tremendous destruction of life and environment that was caused by human carelessness, errors and mistakes, one is forced to conclude that nuclear power is not astable energy-producing option. The Soviet government was severely criticized for its incompetence and mismanagement in the Chernobyl catastrophe. Some people believed that such a disaster could only have happened under a rigid political system such as the Soviet Union. However, the crisis management of the Japanese government after the Fukusima nuclear accident of 2011 was no more reliable and trustworthy. That being said, the danger of nuclear power is not related with the type of political system is. The study of Chernobyl must not be the ‘chronicle of the future’, as the subtitle of a book by SvetlanaAleksievich about Chernobyl’s victims is called.

주제어 체르노빌(Chernobyl), 원전 참사(nuclear power disaster),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peaceful uses of atomic energy), 원전 안전 신화(safety myth of nuclear energy), 원자로 결함(deficiencies of reactor)

투고 130122 / 심사완료 130225 / 게재결정 13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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