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경제통신
제202327호 [통권 제287호]
2023년 7월 7일 금요일
발행인: 이승무
발행처: 순환경제 연구소
주소: 서울시 송파구 동남로 2길 18. 전화: 070-7767-5510
핵에너지의 폭력성에 관한 성찰

거의 대부분의 우라늄은 238U인데, 0.7%의 우라늄은 우라늄-235로 알려진 동위원소라고 합니다. 235U는 238U와 같은 숫자인 92개의 양성자를 가지고 있지만, 중성자의 개수는 146개가 아니라 143개입니다. 이렇게 N(중성자):P(양성자) 비율이 약간 낮아짐으로 인해 235U는 238U보다 원자핵이 불안정합니다.
불안정한 원자핵은 소립자나 에너지를 방출하면서 더 심하게는 쪼개지면서 중성자와 양성자 간의 균형을 복원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불안정한 동위원소 우라늄-235의 원자핵 하나가 분열하면 두 개 또는 세 개의 미주 중성자가 방출되는데, 이들은 다른 우라늄-235의 원자핵에 의해 포획됩니다. 중성자를 포획한 이들은 즉시 매우 불안정한 상태가 되며, 결국 더 많은 중성자와 열 형태의 에너지를 방출하면서 추가적 유도 분열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초기 핵분열은 2개의 유도 분열을 생성하게 되고, 그 다음 4개, 8개, 16개, 32개(2의 승수형태) 등의 연쇄반응이 일어나게 됩니다. 분열이 80개 또는 그 이후를 넘어서면 연쇄반응은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방출하는데, 이것이 핵폭발입니다. 그러므로 원자폭탄의 원리는 연쇄반응을 어떻게 한꺼번에 일으키는가에 관한 것으로, 생성된 중성자의 집약, 유도분열을 일으키는 비율, 핵분열성 물질의 표면에서 손실률을 조정하는 문제입니다. 두 개의 작은 핵분열성 물질 덩어리를 빠르게 하나로 합쳐 임계질량을 넘겨 연쇄반응이 지속되도록 하면 바로 핵무기가 됩니다. 원자력을 이용한 발전은 이보다는 좀 더 통제된 연쇄 반응을 필요로 하는데, 폭발가능성 없이 열원 수준에 머무르게 해야 합니다. (이상은 데이비드 엘리엇의 “원자력 우리의 미래인가?”, 이지민 옮김, 교보문고 2007년에서 pp. 39-43에서 거의 그대로 베껴 쓴 것입니다)
이런 설명대로라면 무기용이든 열의 발생을 이용한 화력발전용이든 핵에너지는 원자물리학의 이론적인 지식을 응용하여 얼마나 공학 기술적으로 효율과 효과를 최대화하는 수단과 장치를 개발하느냐 하는 문제로 집약됩니다. 이를 구현하기 위한 맨하탄 프로젝트는 1941년부터 1946년까지 13만 명의 인원이 투입되어, 프로젝트에 쏟아부은 비용은 당시 돈으로 20억 달러, 2023년 기준으로 따지면 330억 달러, 즉 대한민국 원으로 환산하면 약 39조 9,600억 원으로 2023년 한국 총 국방 예산(약 57조 원)의 70% 정도의 거액이 들어간 거대 공학 프로젝트입니다.
이러한 투자가 당시에는 아무런 이익회수 대책 없이 미국정부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런 돈을 쏟아 부은 효과가 반드시 입증되어야 했습니다.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 투하 실험이 막 완료된 핵폭탄이 투하된 것은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이 전쟁 막바지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 일본 본토에 상륙하는 점령 작전을 펼쳐야 하는데, 이로 인해 초래될 인명피해가 너무 클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었지만, 그것은 나중에 원폭투하를 정당화하기 위해 찾아내어진 과장된 숫자들로 제시된 것이었음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보다 중요했던 이유는 소련이 동아시아에서 참전하기 전에 극적인 공포심을 야기하는 무기를 사용하여 전쟁을 미국의 승리로 끝내어 소련의 동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 덕분에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것에서 다급해진 소련군은 8월 9일에 바로 참전하여 두만강을 건너 한반도로 들어왔고, 한반도가 결과적으로 미국 측과 소련 측의 경쟁적인 분할 점령으로 분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일본은 그 전부터 비밀리에 전쟁당사국이 아닌 연합국세력 소련에 평화 교섭을 주선해 달라고 하고 있었으며, 소련이 원폭 투하 때문에 서둘러 참전한 것이 일본에게는 항복하고 전쟁을 끝내게 한 절망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 역사연구자들에 의해 드러났습니다.
이러한 원폭투하는 2차세계 대전 중의 무차별 폭격에 의한 공포심의 극대화 전술의 연장선상에서 나왔고, 원폭투하 이후에 한국전쟁에서 미국의 무차별 폭격이 극도에 달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핵무기의 비인도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유엔에서 2021년 초부터 발효된 핵무기금지조약을 필요한 조약으로 보고 한국을 포함하여 모든 나라들이 이에 가입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지만, 핵무기의 사용을 가져온 그 정신 자체가 달라지지 않은 채로 힘을 그대로 가지고 살아 있다면 그것은 핵무기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국가 중심의 거대 프로젝트라는 성격은 핵발전소에도 그대로 계승되며, 이것 역시 저렴한 전기의 공급이라는 극적인 효과로 포장되어 당연한 시설물로 자리를 잡고서 그 위험성을 말하는 잠재적 피해자들을 주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희생이나 생태계의 피해쯤은 당연히 수용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는 그 기술의 역사 자체가 전쟁에서 승리하려는 목적에서의 무차별 살상행위를 공학적으로 우위에 선 기술로 자행한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인데다 핵발전소를 건설하는 국가권력이 전쟁목적을 위한 다수의 민간인 살상행위에 대해 전혀 반성도 사과도 하지 않은 상태로 그대로 계승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는 미국 정부의 승인과 방조에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미국이라는 국가 자체는 20세기를 거치면서 세계적으로는 거대한 살인 기계로 진화한 괴물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자민당 정부는 1955년 그 출발부터 미국의 대외정책과 핵에너지 정책을 충실히 따르는 것을 강령의 골자로 한 자민당 체제의 그야말로 꼭두각시 정권이지만, 미국과의 사이에 주고받는 것이 있습니다. 미국의 핵에너지(핵무기+핵발전) 기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무차별 인명살상의 과거사를 불문에 부치는 대신에 일본의 아시아에서의 침략행위와 반인도적인 행위들에 대해 미국이 면죄부를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일본을 아시아 지역에서의 미국의 패권정책에서 핵심 동맹으로 삼고 중국, 북조선을 제외한 아시아 국가들을 그 세력권 안에 순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고받는 것이 확실한 동맹관계에서 오염수 방류가 주민들의 찬반에 상관없이 추진됩니다. 지금의 세계에서 국가는 과학자들과 공학자들에게 프로젝트를 주어서 국가 목적을 실현할 권력수단을 만들어내는 데 혈안이 되어 있고, 그런 일을 가장 대규모로 효과적으로 잘 하는 나라가 미국과 같은 강대국입니다. 지금 시대에 공학자들과 과학자들은 돈이 없으면 실험을 못 해서 논문도 못 쓰고 아무 노릇도 못하기 때문에 돈을 확보하기 위해서 프로젝트 참여와 수주에 매달려 있습니다. 그 프로젝트는 대부분이 국가와 공공기관, 그리고 일부의 민간 대기업에서 나오게 됩니다. 그러니 대다수의 과학자들과 공학자들은 알고 있는 것이 있어도 국가에게 점을 찍히지 않기 위해 의견 표명을 하지 않거나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도 적당히 면피하는 수준으로 말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국가 소유의 원천기술들은 군사부문에서 국가이익을 수호하는 데 사용되든지 민간 산업계로 이전되어 상업용으로 응용이 됩니다. 이러한 것이 어선들이 선단을 조직하여 대량으로 물고기를 잡아들이는 조직체를 이루는 것과 비교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돈과 결부되어 국가와 산업경제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정신적 핵심에는 사람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데는 무관심한 관성이 들어 있고 더구나 생태계에 자생하는 무수한 종류의 생물체들의 건강에 관심을 가질 공간이 없습니다. 이러한 시스템에 전문가들이 포획되거나 공생관계로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출발점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무차별 인명살상이라는 전에 없던 전쟁범죄를 저질렀으면서도 전승국으로서 처벌 받지 않은 연합국 측, 특히 미국과 영국의 전쟁을 지휘한 수뇌부에 있습니다. 과거 범죄행위에 대한 이들의 사과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바로 일본의 오염수 해양 방류가 추진되는 배경입니다. 이러한 시스템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거기에 공생하여 살아가는 수많은 전문가들, 행정가들, 기업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극소수의 이탈자를 제외하면 먹고 살아야 하고, 자기가 배운 것을 써먹어야 한다는 이유로 알고 있는 것에 침묵하면서 범죄를 방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거대한 폭력의 구조이고 핵에너지와 관련된 것들은 이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 문화권에서 대체로 공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인문정신(spirit of humanism)은 이에 저항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저항하지 않는 사회과학은 이미 포획된 사회과학이고, 이 현실을 추적하지 못하는 역사학은 보편적인 인간적 가치를 상실한 역사학으로서 문제가 됩니다. 지금의 경제학은 거의 이러한 시스템에 예속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역사적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로 공학적인 방법론에 매몰되어 경쟁적으로 시장에서 돋보이려는 목적의 논문들을 양산하는 시스템에 학자들이 예속되게 만든 미국식 시스템의 승리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거대한 벽 앞에서 한가하게 ‘순환’을 이야기하는 것이 공허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지구생명계에서 모든 것이 돌고 돈다는 순환의 원리를 저들이 궁극적으로 두려워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카테고리: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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