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원자력연구소들의 탄생과 변신
Transformation of German Nuclear Energy Institutes
이필렬 (방송통신대학교)
1945년 4월 독일의 이차대전 패망이 가까이 왔을 때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한 독일 원자과학자들은 연합군에게 체포되어 영국의 Farmhall이라는 시골에 억류되어 있었다. 억류 중이던 8월 이들은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소식은 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충격의 원인은 두가지였다. 하나는 이 무시무시한 무기가 개발되어 실제로 사용되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미국이 그들보다 몇 발자국 앞서 있었다는 것이었다. 전쟁 중 그들도 독일에서 우라늄협회(Uranverein)를 만들어 원자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원자폭탄의 히로시마 투하소식을 듣기 전까지 자신들의 연구개발 능력이 미국보다 앞서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나치의 만행과 유대인 핍박으로 아인슈타인, 막스 보른, 한스 베테, 제임스 프랑크 같은 상당수의 최고 과학자들이 독일을 떠나 미국이나 영국으로 망명했음에도, 남은 과학자들만 가지고 원자무기 개발에서 미국을 앞서 나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실제로는 미국이 그들보다 크게 앞서 있었다는 사실이 온세계에 드러났으니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 이들은 그들의 연구가 미국보다 우월하다는 것에 대해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기에, 처음 투하 소식만을 들었을 때는 그것이 원자폭탄이라는 것을 믿지도 않았다. 그후 이 무기의 특징에 대한 설명을 뉴스로 듣고 나서야 투하된 무기가 원자폭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결국 자신들의 연구가 보잘것 없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이젠베르크는 당시 원자물리학계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여겨졌는데, 그가 원자폭탄 제조를 위해서 필요한 우라늄의 임계질량이 킬로그램이 아니라 톤 단위에 달하고, 따라서 우라늄 확보에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미국이 원자폭탄을 개발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보는 실수까지 저질렀으니 굴욕감은 매우 컸을 것이다. 우라늄 핵분열을 발견한 화학자 오토 한도 함께 억류되어 있었는데, 그는 독일 물리학자들의에 대해 공공연하게 실망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억류되었 있던 독일 과학자들의 이 뒤처짐에 대한 자각, 실망감, 굴욕감은 독일로 귀환한 후 그들의 후속 행보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독일로 돌아간 후 이들은 독일 과학의 재건을 위해 온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이 재건을 위해 가장 관심을 기울였던 분야는 민간용 원자력 개발이었다. 미국과 영국에 비해 뒤처져 있다는 인식, 굴욕감은 더욱 그들의 의욕을 부추겼다. 또한 2차대전 중 그들이 원자무기 개발연구를 수행했고, 이를 통해 히틀러에게 협력했다는 사실을 가능한 한 빨리 지워버리기 위해서도 ‘평화적’인 민간용 원자력 연구에 속히 뛰어들고 싶어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실험이나 개발과는 거리가 아주 먼 순수 양자물리학자였다. 그가 독일 우라늄협회에서 원자무기 개발을 이끌었던 이유는 전쟁 중에 예비역 군인으로 소집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패전 후에는 다시 양자물리학 연구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울 텐데, 그것보다 원자력 연구소 설립을 위해 상당한 열정을 쏟았던 이유도 일부 거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독일을 점령한 연합국은 독일에서 무기연구와 직결될 수 있는 원자력과 우주항공 분야의 연구를 금지했고, 이로 인해 원자력 연구소 설립은 금지가 해제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들의 염원은 1953년 아이젠하워의 “평화를 위한 원자” (Atoms for Peace) 선언이 나오고, 1955년 5월 5일 연구 금지가 풀리자 현실화되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독 연방정부에서는 1955년 10월 6일 연방원자력부 (Bundesministerium für Atomfrage)를 신설하여 원자력 연구와 이용에 적극적인 의지를 나타냈고, 수상 아데나워의 과학 자문역을 하던 하이젠베르크는 핵분열을 발견한 오토 한 등의 과학자들과 함께 국가적인 원자력연구소 설립을 요구했다. 연방원자력부라는 명칭은 1957년 연방 원자핵에너지 및 물관리부 (Bundesministerium für Atomkernenergie und Wasserwirtschaft (BMAtW)로, 1961년에는 다시 연방 원자핵에너지부 ((Bundesministerium für Atomkernenergie), 그리고 1969년에는 연방 교육 및 연구부(Bundesministerium für Bildung und Forschung)로 이름이 바뀌는데, 이는 원자력이 서독정부 출범 초기에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어졌는지를 잘 보여준다. 과학자들의 요구는 연방 차원에서 칼스루에 원자력연구센터 (Kernforschungszentrm) 설립으로 결실을 맺었다. 처음에 하이젠베르크는 그의 고향인 뮌헨에 설립할 것을 고집했지만, 아이젠하워는 연합군 주둔사령관들에게 조언을 구한 결과 동구 블럭과 가까운 곳보다 프랑스에서 가까운 서쪽에 설립할 것을 권유받아 칼스루에로 결정하게 되었다.
칼스루에 원자력연구센터는 연구제한이 해제되고 나서 일년이 지난 1956년에 출범했다. 그런데 이곳에만 연구소가 들어선 것이 아니었다. 북부 함부르크쪽에서는 나치독일의 원자무기 개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물리학자 카를 디브너와 에리히 바게 주도로 1956년 “선박용 핵에너지이용 유한회사” (Gesellschaft für Kernenergieverwertung in Schiffbau und Schiffahrt GmbH , GKSS)가 설립되었고, 독일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서는 주 차원에서 독자적으로 1956년 12월 „원자력연구소“ (Kernforschungsanlage Jülich) 설립을 결정했다. 아이젠하워의 선언 이후 전세계는 원자력 이용에 대해 열광적으로 환영했는데, 독일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독일 사회의 원자력 연구에 대한 열광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원자력연구센터의 칼스루에 설립 결정으로 스스로 원자력 연구에서 손을 뗀 하이젠베르크에게는 위로용으로 뮌헨에 연구용 원자로가 들어섰고, 프랑크푸르트와 베를린에도 연구용 원자로가 들어섰다. 프랑크푸르트의 원자로는 대학의 연구용이었고, 베를린 원자로는 핵분열을 발견한 오토 한과 리제 마이트너의 이름을 따서 설립된 „한-마이트너 핵연구소“ (Hahn-Meitner Institut für Kernforschng) 소속이었다.
독일에 설립된 연구소나 원자로는 둘로 나눌 수 있다. 칼스루에, 윌리히, GKSS 는 대체로 응용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서 설립되었고, 나머지는 순수 연구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앞의 세 연구소에서는 설립후 원자력에 대한 사회적 열광에 힘입어 매우 의욕적으로 연구개발을 수행했다. 윌리히 연구소에서는 설립후 바로 원자로 건설에 들어가 1960년대 초에 5MW (나중에 10MW로 확장) 출력을 가진 경수로형 Merlin과 출력 10 MW (나중에 15MW로 확대)의 중수로형 DIDO가 완공되었다. 이 두 원자로는 순수한 연구용이었는데, 그후 상업용으로 하이젠베르크의 제자 슐텐 (Rudolf Schulten)이 제안한 기체냉각흑연감속 고온로가 1961년 건설에 들어가 1966년에 완공되었다. 이 원자로는 전력용량이 13MW였지만 (참고: 고리 1호기 58MW), 공모양의 핵연료를 사용하는 새로운 형태의 상업적 전력생산용 원자로로 테스트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가동 중 여러차례 사고나 고장이 있었지만1988년까지 가동되었고, 총 약 1506 GWh의 전기를 공급했다. 연구소에서는 고온로를 독일의 신개념 원자로로 개발하여 전력생산용으로 확산시키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988년 폐쇄후 검사과정에서는 고온로에서 핵연료 손상까지 일어났다는 점이 발견되었다.
칼스루에 연구소는 독일을 대표하는 원자력연구소로 원자력 이용과 관련된 거의 모든 연구개발이 수행되었다. 함부르크 연구소보다 조금 늦었지만 1961년부터 계속해서 여러개의 연구용 원자로가 완공되었고, 그후 고속증식로,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시설이 건설되었다. 1961년에 완공된 원자로는 열출력 44 MW의 중수로였는데, 1981년까지 가동되었다. 뒤이어서 63년부터 66년까지 4년에 걸쳐 모두 4개의 연구용 원자로가 완공되었는데, 1966년에 완공된 원자로 하나는 1996년까지 30년간 가동되었다. 독일 과학자들은 당시에 꿈의 원자로로 여겨지던 고속증식로 연구개발도 반드시 도전해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이들은 연구소 설립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고속증식로 건설 준비에 들어갔고, 이를 위해1960년 고속증식로 프로젝트 팀을 출범시켜 본격적으로 연구개발에 착수했다. 팀의 리더는 독일 고속증식로의 아버지로 불리는 볼프 해펠레로 그는 1972년까지 프로젝트를 이끌었는데, 1971년 고속증식로 전단계의 원자로를 개발했다. 연구소에서는 그후 이 원자로를 나트륨 냉각 고속증식로로 개량했고, 1977년부터 가동을 시작했다. 이 원자로는 1985년에 독일 칼카에 세워지는 고속증식로의 시험로 역할을 했는데, 칼카 고속증식로가 1991년 가동되지도 못하고 폐기됨에 따라 함께 폐기되었다. 미국의 연구자와 원자력발전산업체와 마찬가지로 독일 연구자들과 산업체에게도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시설은 핵연료 주기를 완성시키기 위한 필수 설비로 여겨졌다. 따라서 이 시설의 설치도 비켜갈 수 없는 것이었는데, 재처리시설 건설은 1960년대에 시작되어 1971년에 칼스루에 연구소에 파일럿 플랜트가 완공되었다. 이 시설에서는 1990년 폐쇄될 때까지 200톤 이상의 핵연료 재처리가 이루어졌다. 같은 해에 결국 중단 결정이 내려진 바이에른주의 바커스도로프 재처리시설은 이 시설의 산업적 규모로의 확장이었지만 독일 반원자력운동의 결과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GKSS의 목표는 선박용 원자로를 개발하여 원자력으로 구동되는 선박을 건조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연구소는 1964년 연구용 원자로를 건설하고, 1968년에는 오토 한이라는 이름의 원자력 배를 완공했다. 이 배는 실제 무역선으로 전세계를 오갔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원자력 배는 경제성이 없다는 것으로 판명되어 이 프로젝트는 끝나고 말았다.
윌리히, 칼스루에, GKSS 연구소는 1980년대부터 큰 변화를 겪게 된다. 1960년대와 70년대까지 연구소는 전전 세대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이들의 행동 저변에는 패전, 패전으로 파괴된 독일, 뒤처진 독일이라는 기억과 그것으로부터의 회복에의 열망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에게 원자력연구는 이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고 회복 열망을 충족시켜 주는 실제적이면서 상징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서서히 물러나고 1970년대 말, 80년대에 연구소의 주도 인력으로 자리잡은 전후 세대에게는 원자력 연구가 지닌 상징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이들에게 전전 세대는 나치 독일의 협력자, 원자무기 개발을 위한 우라늄협회의 직간접적 관련자일 뿐이었다. 이러한 인식을 지닌 전후 세대 연구자들이 1970년대부터 독일에서 강하게 불붙은 반원자력운동을 무시하거나 거부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러한 영향 등으로 연구소들은 서서히 변화해갔다. GKSS는 원자력선박 연구를 포기하고 원자로안전과 재료연구로 방향을 튼 후, 현재는 원자력 연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재료, 수소기술, 환경, 해양 연구를 수행하는 연구소로 거듭났다.
윌리히 연구소는 1990년 명칭에서 원자력을 떼어내어 윌리히 연구센터로 바꾸고 전체 인력 5000여명 연구인력이 3000명에 달하는 대규모 연구소로 성장했는데, 연구분야는 에너지, 환경, 지질, 생물, IT, 입자물리학, 양자물리학 등이다. 연구소에는 폐쇄되어 해체될 고온로가 남아 있지만, 원자력 연구는 모두 사라져버렸다. 칼스루에 연구소도 1990년대에 원자력이 떼어내어지고 칼스루에 „연구센터-기술과 환경“ (Forscchungszentrum Karlsruhe – Technik und Umwelt)로 이름이 바뀐 후 2000년대에는 칼스루에 공과대학과 통합되어 칼스루에 공학연구소 (Karlsruhe Institut for Technology)로 이름이 바뀌었다. 연구소에서 수행하는 분야는 에너지, 환경, 기초 물리 등이고, 원자력 관련 연구로는 핵융합 연구가 남아 있을 뿐이다.
<참고문헌>
Walker, Mark, Die uranmaschine, Berlin, 1990
Trischler, Helmut; Hofmann, Dieter, Grossforschung in Deutschland
하이젠베르크, 부분과 전체
카테고리:04월-전력수급기본계획과 원전문제,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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