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한국 탈핵운동 전개와 과제
이헌석(에너지정의행동 정책위원)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와 탈핵운동의 시작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나기 전, 한국 반핵운동은 암흑기를 걷고 있었다. 2005년 경주와 군산, 영덕, 포항에서 이뤄진 정부 주도의 핵폐기장 유치 찬반주민투표는 반핵운동에 큰 타격을 주었다. 주민투표 과정에서 사상 유례없는 금권, 관권 선거 논란이 있었지만, 지자체 간의 경쟁과 ‘3천억 원 + 알파라는 천문학적인 지원금 앞에 많은 이들은 주민투표에서 핵폐기장 유치 찬성표를 던졌다. 그리고 경주시민 89.5%의 찬성으로 경주가 핵폐기장 부지로 확정되었다.
이 사건 이후 핵발전소, 핵폐기장에 대한 찬반은 해당 지역주민이나 극소수 반핵운동가들의 전유물처럼 취급되었다. 2006년 고리 1호기 수명연장이나 2008년 저탄소녹색성장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나 크게 부각되지 못했고 과거 지역주민과 시민사회단체가 결합한 강력한 반핵운동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 기름을 부은 것은 2009년 이명박 대통령의 아랍에미리트(UAE) 핵발전소 수출이었다. 당시 정부는 정규 방송까지 중단하면서 핵발전소 수출 사실을 홍보했고, 핵발전소는 단순한 발전소가 아니라 외화 수입까지 가져다주는 ‘효자 상품’으로 각인되었다. 반면 핵발전소 수출에 반대하는 이들은 ‘수출까지 반대하는 생각 없는 빨갱이’로 몰려 인터넷상에서 치도곤을 당하기 일쑤였다.
후쿠시마 사고는 이 모든 상황을 정반대로 만들었다. 그동안 핵산업계는 ‘핵발전소는 핵무기와 달라 절대 폭발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반복해 왔다. 하지만 동일본대지진 이후 후쿠시마 핵발전소는 차례로 폭발했고, 그 장면을 모두가 TV 생중계로 지켜보았다. 정부와 핵산업계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어졌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가장 크게 눈에 띄는 변화는 과거 ‘반핵운동’이란 표현이 ‘탈핵운동’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핵발전소와 핵폐기장, 핵무기 등 핵분열 물질의 위험성과 차별성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핵에너지 이용을 막는 운동을 흔히 반핵(反核, Anti-nuke)운동이라고 부른다. 이는 국어사전에 등재될 만큼 보편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에 반해 탈핵(脫核)이란 말은 그리 널리 통용되는 표현이 아니다. 영어권에선 일부 단체가 ‘핵을 넘어(Beyond Nuclear)란 표현을 사용하고는 있으나 운동 전체를 통칭하는 개념은 아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탈핵이란 말이 일본과 한국 양국에서 확산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기존 반핵운동이 가진 극단적이고 소수파적인 이미지보다 ‘핵발전소에서 벗어난다’라는 의미의 탈핵이 핵발전의 대안을 함께 갖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핵발전소 인근 주민들의 과격한 시위, 근본주의자들의 고함과 구호와 달리 탈핵은 합리적 대안과 정책적 접근을 포괄하는 용어로 각인되었고,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새롭게 핵발전소 문제에 눈뜬 이들에게 선택되었다. 이런 변화는 용어의 변화로만 그치지 않았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방사능에 오염된 일본산 수산물에 대한 우려, ‘방사능 아스팔트’ 등 일상생활 주변의 방사성 물질에 대한 문제는 과거 반핵운동의 주제와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탈핵 운동으로 이름이 확장되면서 전통적인 반핵운동의 주제인 핵무기, 핵발전소, 핵폐기물 문제 이외에도 에너지전환, 재생에너지, 에너지 자립, 방사능 식품 오염 같은 주제들이 포괄적으로 탈핵운동에 담기게 되었다.
탈핵운동의 확산
흔히 한국의 시민사회운동은 큰 이슈가 발생하면 다양한 조직이 힘을 모아 연대체를 만들고 해당 이슈에 대응하는 사업을 펼치는 방식으로 활동을 해왔다. 이는 한국 시민운동의 독특한 연대 전략이다. 4대강 문제, 제주 강정해군기지 문제, 밀양 송전탑 문제 등 큰 이슈가 발생하면 환경단체, 평화단체, 지역주민단체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연대 단체들이 함께 문제 해결에 나서는 것이다.
반핵운동도 안면도, 굴업도, 부안 등 굵직굵직한 핵폐기장 문제가 불거졌을 때, 해당 지역주민과 환경단체들만 활동한 것이 아니라 해당 문제에 관심이 있는 다양한 단체들이 함께 연대 활동을 벌여 투쟁을 승리로 이끈 경험이 있다.
이와 같은 활동방식은 큰 이슈에 대해 규모 있는 대응을 할 필요가 있을 때는 매우 효과적이다. 하지만 사회적 파장이 크지 않거나 장기적인 사안, 전문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힘을 내기 어려운 한계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런 단점들 때문에 그동안 반핵운동 내부에선 ‘반핵운동을 전담하는 단체’의 필요성이 제기되곤 했다. 즉 이슈의 부침에 상관없이 지속적으로 문제를 모니터링하고 활동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반핵만을 주제로 한 단체(모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흐름은 후쿠시마 사고 이후 현실화하였다. 차일드 세이브 같은 주부 모임, 탈핵신문 같은 탈핵 전문 언론사, 탈핵학교나 태양의 학교처럼 탈핵 교육을 고민하는 단체, 반핵의사회나 탈핵교수모임, 탈핵변호사모임 같은 전문가 모임, 천주교 탈핵연대 같은 종교조직들이 새롭게 만들어졌다. 또한 이런 조직들의 연대체도 종류가 많아져서 앞서 언급한 핵공동행동이외에도 핵발전소와 연구용 원자로 등 핵시설 인근 지역주민대책위의 연대체인 탈핵지역대책위가 만들어졌다. 지역별로는 광역단위로 탈핵운동을 고민하는 단체들이 모여 광역단위 연대체를 새로 만들었는데, 대구·경북, 광주전남, 전북, 충북지역에 광역단위 탈핵 연대체가 만들어져 활동하고 있다.
탈핵을 향한 다양한 민주주의적 실험
2011년 이후 국민들의 핵에너지에 대한 우려는 커졌지만, 정부는 정책을 바꾸지 않았다. 해당 지역을 중심으로 삼척과 영덕의 신규 핵발전소 반대 운동, 대전 유성의 민간환경감시기구 건설 운동, 부산 기장군의 해수담수화 가동 반대 운동 등 다양한 운동이 벌어졌지만, 그때마다 정부는 ‘강행’을 선택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해당 지역주민들은 단순히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이를 민주주의적 행위로 연결하는 실험을 단행한다. 주민소환과 주민투표, 조례 청원 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삼척에선 지역주민들의 의사를 묻지 않고 핵발전소 유치신청을 진행한 삼척시장을 소환하기 위한 운동이 벌어졌다. 삼척의 주민소환 운동은 안타깝게도 투표율 미달로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 성과를 바탕으로 2013년 주민투표 운동에 돌입, 결국 삼척시민 다수가 핵발전소 유치에 반대함을 확인하였다. 이에 정부는 2004년 부안 주민투표와 마찬가지로 삼척 주민투표는 법적 효력이 없는 행위라는 것을 강조했지만, 주민들의 의견을 무시하지는 못했다. 결국 정부는 2015년 확정된 제7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 삼척 핵발전소는 부지를 확정 짓지 못한 채 2018년 최종 부지를 확정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명목상으론 삼척 주민투표를 인정하지 못하지만, 그 결과까지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결과이다.
2013년 삼척 주민투표의 성공은 이후 영덕과 기장으로 이어졌다. 2015년 영덕에서 진행된 자발적 주민투표는 영덕 주민들 또한 핵발전소 유치에 반대함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2015년 대전 유성에선 1만여 명의 주민들이 민간환경감시기구를 설치해달라는 주민 청원에 서명했다. 대전 유성엔 핵연구시설은 한국원자력연구원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모든 핵발전소의 핵연료를 생산하는 한전원자력연료, 병원이나 연구소에서 사용한 방사성동위원소 폐기물을 관리하는 중저준위 핵폐기물 보관소 등 핵시설이 산적해 있다. 그동안 수많은 사회적 갈등을 겪었던 핵발전소 지역과 달리 유성의 핵시설은 큰 갈등을 겪지 않으면서 지역주민의 알 권리와 안전 문제가 등한시되었다. 핵발전소 지역은 지역주민들의 반핵운동을 통해 정보공개와 안전규제에 대한 최소한의 장치를 갖췄으나 유성에선 그런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에 유성주민들은 다른 핵발전소 지역과 같이 민간환경감시기구 건설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는 번번이 무산되었고, 결국 주민 청원을 통해 이를 공식적으로 요구하게 된 것이다. 조례 제정과정에서 수차례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지만, 결국 유성엔 전국 최초로 주민 청원으로 핵시설에 관한 조례가 만들어졌다. 이런 흐름은 2016년 3월 진행된 기장의 해수담수화 시설 찬반 주민투표, 2020년 경주 맥스터 건설에 반대하는 울산 북구 주민투표로 이어져 오고 있다.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와 이후 탈핵운동 흐름
2016년 여름, 탈핵진영은 「잘가라 핵발전소 100만 서명운동」(이후 100만 서명운동)을 기획했다. 탈핵운동진영의 연대체 「핵없는 사회를 위한 공동행동(이하 탈핵공동행동)」을 중심으로 시민사회단체와 노동계, 종교계 등을 총망라한 100만 서명운동은 당시 2017년 12월 예정되어 있던 대선을 겨냥한 것이었다. 2016년 10월 서명을 시작한 100만 서명운동본부는 다음 해 6월까지 모두 33만 8천 명의 서명을 받았다. 100만 명의 서명을 받는 목표에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이 성과는 그간 탈핵운동진영이 단 한 번도 이뤄내지 못한 성과였다.
당시 100만 서명운동은 신규 핵시설(핵발전소와 핵폐기물 임시저장고, 핵 연구시설 등) 철회, 노후핵발전소 수명연장 금지, 고준위핵폐기물 재공론화 등 모두 6가지 요구사항을 걸었다. 그중에서도 우선순위가 가장 높았던 것은 신고리 5·6호기 핵발전소 건설 백지화였다. 이는 부산과 울산 등 영남권 탈핵진영의 요구가 컸던 것도 있었지만, 2016년 9월 경주지진 이후 양산단층 인근 핵발전소 안전에 대한 우려와 관심이 높아진 것이 크게 작용했다.
이는 정치권도 마찬가지여서 2017년 5월 대선에서 각 정당 후보는 부산, 울산권 선거 공약으로 신고리 5, 6호기 건설 중단 혹은 백지화를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다. 심지어 핵발전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조차 울산 기자회견에서 “원전으로 발전소를 짓는 일은 지양하고 가능하면 신재생에너지 쪽으로 가야 한다”고 발언을 할 정도로 2017년 4~5월의 탈핵 분위기는 뜨거웠다. 하지만 6월 19일 고리 1호기 영구정지행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밝힌 것은 신고리 5, 6호기 백지화가 아니라, “안전성과 함께 공정률과 투입 비용, 보상비용, 전력 설비예비율 등을 종합 고려하여 빠른 시일 내 사회적 합의를 도출”이었다. 당시엔 공사 중지 여부도 명확하지 않았고, 사회적 합의를 만들겠다는 포괄적인 표현만 있었다.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공론화의 최종 결과는 ‘신고리 5, 6호기 건설재개’였다. 2017년 약 석 달 동안 진행된 신고리 공론화는 탈핵진영에는 잊을 수 없는 큰 상처를 남겼다. 이는 단지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의 결과가 ‘건설 재개’로 나왔기 때문은 아니다. 공론화의 결정 단계, 탈핵진영 대응 여부에 대한 결정단계, 공론화 진행 과정에서 미숙한 점들이 너무 많았다. 향후 탈핵진영이 국민들에게 무엇을 설득해야 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남겼다.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 결과에도 불구하고 위험하고 미래세대에서 무거운 짐을 떠넘기는 핵발전의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다. 영광 한빛 3, 4호기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확인된 핵발전소 격납건물 구멍 문제, 경주 맥스터(사용후핵연료 임시저장시설) 건설과 사용후핵연료 문제, 고리 1호기 폐쇄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 등 핵발전소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울진 신한울 3,4호기 건설을 주장하는 핵산업계의 주장은 점점 거세지고 있다. 특히 기후위기 심화에 따라 핵발전을 대안으로 주장하는 그들의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다. ‘2050년 탄소 중립’을 선언한 이때, ‘핵없는 대한민국’을 염원하는 한국탈핵운동의 움직임에 따라 한국사회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카테고리:12월호_창립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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