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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발전소 위험과 대책]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에 대한 일본의 대응 사례의 교훈(최종민, 윤순진)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에 대한 일본의 대응 사례의 교훈(주1)


최종민(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박사과정생), 윤순진(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

이번 장에서는 2011년 3월 11일 일본에서 발생한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에 대해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이 취했던 대응의 문제점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의 1차적인 원인은 역대 최대 규모의 지진과 지진해일 (tsunami, 쓰나미)이었지만 그러한 자연재난의 발생가능성이 제기되었음에도 진지한 대비책을 마련하지 않았다는 점도 비판의 여지가 클 뿐 아니라 사고에 대한 부적절한 대응 역시 피해를 확대시킨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지금도 사고는 충분하게 수습되지 못한 채 여전히 진행 중이며, 약 10만 명가량의 후쿠시마 이재민들은 여전히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아니, 언제쯤 돌아갈 수 있을지 기약하기조차 어렵다.
사고 당시 일본에는 총 49GW에 달하는 54기의 핵반응로가 있었다. 후쿠시마 핵발전 사고 직전 해인 2010년 일본에서는 핵발전으로 288TWh를 생산하였는데 이는 일본 발전량의 26.0%에 해당하였다(IEA, 2012). 2014년 현재 우리나라에는 24기(21.7GW)의 핵반응로가 149TWh를 생산하여 총 발전량의 약 30.4%를 차지하고 있다. 후쿠시마 사고 이전 일본의 핵발전 전력 생산량은 우리나라의 두 배에 가까웠지만 발전량 중 비중으로는 유사한 수준이라서 전력 공급원이나 산업활동의 에너지원으로서 핵발전이 지닌 사회적 역할은 비슷했다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에서는 심각한 수준의 지진이 별로 발생하지 않고 있지만 핵발전소나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인근에 활성단층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어서 지진으로 인한 핵발전 사고의 가능성을 무시하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와 같은 비극이 재연되지 않으려면 일본이 후쿠시마 핵발전 사고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깊이 있게 검토하고 문제점을 확인한 후 적절한 대응방안을 마련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후쿠시마 핵발전 사고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값비싼 교훈이라 할 수 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는 여전히 진행 중이기에 종결된 사고가 아니다. 따라서 사고에 대한 대응에는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이 현재까지 취해온 대응 모두가 포함되어야 하지만 이 모두를 검토하기에는 지면상의 한계가 있고 피해가 확산되는 데는 초기 대응 실패가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이 글에서는 논의의 범위를 초기 대응으로 한정하고자 한다. 당시 후쿠시마 핵발전소 1호기와 3호기의 수소폭발과 2호기의 격납용기 손상에 이어 마지막으로 4호기에서 화재가 발생하기까지를 사고 초기단계로 보고 2011년 3월 11일 동북 대지진이 일어난 시점부터 2011년 3월 15일까지로 논의의 시간적인 범위를 제한하도록 한다. 또한 사고 대처라고 하면 핵발전소에서 일정한 거리 이내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피난시키고 일반 국민에게까지 정보를 공표하는 것과 같은 활동도 포함된다. 따라서 이러한 일종의 위험 정보소통에 대해서도 다루도록 한다. 다만 이 경우에는 사고 후 방사능의 이동에 대한 것이므로 앞서 정한 2011년 3월 15일이 지난 시점에 대해서도 필요에 따라 다루기로 한다.
우선 이러한 논의에 앞서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에 대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간략하게 살펴본다. 이후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당시 일본의 원자력 규제 관련 기관과 핵사고 발생 시 대응 체계를 살펴본 후 문제가 되는 사안별로 후쿠시마 사고 대응의 문제점을 검토하도록 한다.

가.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의 개요

2011년 3월 11일 일본열도의 동북 쪽 미야기현 센다이 동쪽 태평양 해역에서 오후 2시 46분에 규모 9.0의 초거대 지진이 발생하였다. 이 지진으로 동일본 지역의 많은 시설들이 파괴되었고 그로 인해 통신과 교통이 마비되는 등 큰 혼란이 빚어졌다. 하지만 초거대 지진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지진으로 인해 발생한 최대 높이 21m의 쓰나미가 도호쿠(東北) 지방에 도달했다. 쓰나미는 도호쿠 지방의 인프라 시설 및 거주지를 침수시켰으며 이 때문에 일본 내에서 전례 없는 피해가 발생했다. 거대한 파도에 집과 자동차들이 떠내려가는 충격적인 모습이 TV를 통해 방송되었고 그것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안타까움과 공포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쓰나미는 단지 주민들이 생활하는 곳만을 파괴한 게 아니었다. 거대한 파도는 후쿠시마현 해안에 위치한 도쿄전력의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일본어명 福島第一原子力発電所, 이후 후쿠시마 핵발전소로 표기)에도 도달했다.(주2) 그리고는 지진으로 전원이 상실되어 전력 공급을 위해 가동 중이었던 핵발전소의 비상발전기를 침수시키고 말았다.
핵발전소에서는 우라늄의 핵분열을 통해 얻은 열에너지를 이용해 증기를 얻고 이 증기로 발전기를 돌려 전기를 생산하여 소비자에게 보낸다. 하지만 핵분열 과정에서 발생하는 열로 인해 핵연료가 녹거나 폭발이 발생하여 생명과 환경을 위협할 수 있는 방사성 물질이 핵발전소 밖으로 방출될 위험이 있으므로 핵발전소에서는 핵연료 냉각이야말로 안전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핵연료 냉각은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 운전 중일 때만 필요한 게 아니다. 지진을 비롯한 위험 상황이 발생해서 운전이 정지되는 경우에도 핵분열이 멈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사성 핵종 붕괴로 인한 붕괴열이 발생하기 때문에 항상 핵연료를 냉각시킬 필요가 있다. 핵연료 냉각은 보통 물을 이용하여 뜨거워진 핵연료를 식히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냉각 과정에도 전기가 필요하다. <그림 1>은 후쿠시마 핵발전소 1호기부터 5호기까지 핵반응로의 구조를 간결하게 나타낸 것인데 압력용기에 핵연료가 들어있어 이곳에서 핵분열 반응이 진행되고 방사성물질이 외부로 새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압력용기를 둘러싸는 형태로 두꺼운 격납용기가 설치되어 있다.(주3)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는 해수를 냉각재로 이용하여 핵연료를 식히게 설계되어 있었다. 동일본대지진 발생 직후 운전 중이던 1호기부터 3호기까지는 운전이 자동정지되었으나 쓰나미로 인해 배전반과 같은 발전소 설비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발전소 내 모든 교류전원이 상실되었다. 그 결과 핵연료를 냉각할 수 없게 되었다.

자료: 東京電力株式会社(2012)
<그림 1> 후쿠시마 핵발전소 1-5호기까지의 핵반응로 개요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했던 2011년 3월 11일에는 1호기와 2호기, 3호기가 운전 중에 있었고 4호기부터 6호기까지는 정기검사로 운전을 하지 않고 핵연료도 핵연료수조에 보관되어 있었다. 4호기의 경우 2010년 11월 30일부터 정기검사에 들어갔기 때문에 사용후 핵연료 수조로 핵연료를 모두 옮긴 상태였고 지진 발생 전에 사용후 핵연료 수조의 온도는 27℃로 냉각이 정상적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이와 반대로 운전 중이던 1호기부터 3호기까지는 핵연료가 압력용기에 들어있었다.
동일본 대지진 발생 다음날인 2011년 3월 12일에는 1호기가 수소폭발을 일으켰고 이틀 후인 14일에는 3호기에서, 15일에는 4호기에서 수소폭발이 발생했다.(주4) 특히 3호기에 장착되어 있던 핵연료는 맹독성 물질인 플루토늄을 포함하는 MOX 연료였다.(주5) 그렇기 때문에 3호기는 폭발하면서 플루토늄이 섞인 방사성 물질을 외부로 흩뿌렸다. 2호기는 수소폭발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냉각기능의 상실과 압력용기의 감압실패로 인해 주수를 하지 못하게 된 것 등을 원인으로 격납용기가 크게 손상되어 각 호기들 중 가장 많은 양의 방사성물질을 방출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주6) 또한 1-3호기에서는 운전 중인 상태에서 냉각이 가능하지 않아 핵연료가 녹아내리는 노심용융(meltdown, 멜트다운)이 발생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발생 초기의 주요한 사건들을 시간대별로 정리해보면 <표 1>과 같다.

<표 1>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초기 단계의 시간대별 주요 사건(2011년)
자료: 東京電力株式会社(2013), 東京電力福島原子力発電所における事故調査・検証委員会(2012)

일본 원자력안전보안원의 발표에 따르면 이 사고로 인해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방출된 방사성 세슘137의 총량은 1만 5000 테라베크렐 정도이며 이는 히로시마 핵폭탄의 시산치인 약 89 테라베크렐의 168.5배 정도가 된다.(주7) 또한 일본정부가 발표한 후쿠시마 핵발전소로부터 대기 중으로 방출된 물질인 요소131의 총량은 약 100-500 페타베크렐, 세슘137은 총 6-20 페타베크렐이며 이는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로 인해 방출되었다고 추정되는 양의 각각 10%와 20% 정도의 수준이다.(주8) 후쿠시마현 주민 중 지진과 쓰나미를 포함해서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로 인해 타 지역에서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피난민 수는 2015년 10월 기준으로 10만 5,286명이다.9) 또한 2015년 12월 후쿠시마현에서 발표한 국세조사 인구수 조사 결과에 따르면 후쿠시마현의 인구는 사고가 발생하기 전인 5년 전보다 11만명 이상 줄어들어 약 191만 명 정도인데 이는 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최저 수준이다.(주10)
사고 발생으로부터 1년 1개월이 지난 2012년 4월 19일에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1-4호기의 폐기가, 2014년 1월 31일에는 5-6호기의 폐기가 결정되었다. 핵발전소를 폐기하는 것은 일반 건물의 철거와는 비교되지 않는 어렵고 힘든 작업이다.
특히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경우 사고를 일으킨 핵반응로 주변에 맹독성 방사성 물질이 흩뿌려져 있고 오염된 자재들이 엉망으로 흩어져 있으며 녹아내린 핵연료를 꺼내는 일이 그 자체로 위험하고 어렵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 폐로는 <그림 2>에 제시된 것처럼 네 시기에 걸쳐 진행할 계획이다. 2014년 4월 도쿄전력에서는 후쿠시마 제1원전 폐로회사를 설치하여 폐로를 위한 작업을 시작했으나 방사성 물질을 줄이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 흙으로 덮는 제염작업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현장 방사선량이 너무 높아 핵반응로 주변에는 로봇조차 접근하기 힘든 상황에 있다. 이 때문에 폐로 작업이 언제 완료될지는 예측조차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제1기에 해당하는 작업의 경우 당초 계획보다 작업 완료 시기가 1년 넘게 늦어졌다. 4호기의 경우 사고 발생 당시 사용후 핵연료 수조에 핵연료 1,533봉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2013년 11월 18일부터 핵연료를 수조에서 꺼내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 내 공용수조에 이송하는 작업을 시작하여 2014년 12월 22일에서야 완료하였다. 제2기의 녹아내린 핵연료들을 꺼내는 것에 있어서의 시작 작업 역시 쉽게 진행되고 있지 않다. 1-3호기 모두 방사선량이 높기 때문에 작업원이 들어갈 수 없음은 물론 녹아내린 핵연료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격납용기 내부에 넣은 내시경도 방사선량을 감당할 수 없어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현재까지 성과는 카메라를 통해 녹아내린 핵연료의 모습을 영상으로 확인한 것뿐이며 그것의 성질이나 무게, 방사선량 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또한 녹아내린 핵연료를 꺼내는 데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어디에 어떻게 보관해야 할지에 대한 방안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닛폰TV 2016년 1월 2일 기사).(주11) 이러한 상황에서도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는 매일 태평양으로 오염수를 방출하고 있으며 이는 일본을 넘어 해류를 타고 지금도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주12)

<그림 2>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 폐로를 위한 중장기 로드맵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는 2011년 4월 12일 INES 평가에서 가장 높은 등급인 7등급(Severe Accident) 판정을 받았다. 7등급 판정은 1986년 4월 26일 구소련에서 발생한 사상 최악의 핵재앙인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 이후 처음 내려진 것이었다.


나. 사고 당시 일본의 원자력 규제 관련 기관과 대응 체계

이번 절에서는 먼저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발생 당시 일본의 원자력 규제 관련 기관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핵시설은 생명과 생태계에 큰 위험과 피해를 입힐 수 있으므로 핵기술을 이용하고 있는 국가들에서는 정부가 핵시설을 보유하는 사업자를 규제하고 있는데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2차 대전 이후 패전국인 일본은 미 점령당국에 의해 핵 관련 연구와 개발을 금지 당했지만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평화를 위한 원자(Atoms for Peace)”을 제창한 이후 연구 개발에 착수하였다(김지연, 2002; 윤순진・김소연・정민지, 2011). 1954년 당시 개신당 소속이었던 나카소네, 이나바, 사이토, 가와사키 등이 핵에너지 연구개발 예산 235백만 엔을 국회에 제출하였다(Takuma, 2006).13) 이후 1955년 12월 19일에 원자력기본법이 제정되어 원자력 평화 이용의 원칙과 민주, 자주, 공개의 3원칙 등 원자력 이용의 대강이 결정되었고 원자력 기술 연구 및 개발, 평화적 목적에의 사용, 안전 확보 등의 내용을 담게 되었다. 이 법에 원자력위원회와 원자력연구소의 설치를 규정함으로써 일본 핵발전정책의 수립과 연구개발의 기초가 마련되었다(김경민, 2001). 또한 관련법령으로 원자력위원회설치법이 공포되어 1956년 1월 1일 총리부(현재의 내각부)에 원자력위원회가 설치되었다. 현재까지도 존속되고 있는 원자력위원회는 원자력 개발 및 연구에 관한 행정, 원자력 이용에 관한 중요사항에 대해 기획 및 심사, 결정을 소관하고 있다.(주14)
<그림 3>은 2012년 9월 이전의 일본 원자력 행정 체계를 나타낸다.(주15) 원자력안 전위원회는 원자력위원회 소관 임무들 중 안전 확보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내각부에 구성한 조직이다(東京電力福島原子力発電所事故調査委員会, 2012). 1978년 원자력위원회로부터 분리 독립되어 출범한 이후 일본 내의 원자력 안전 규제를 담당해왔다.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원자력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조직인 만큼 핵사고가 발생했을 때 사고 대처를 위한 기술적인 자문을 해주는 역할이 중요하다. 이번 후쿠시마 핵발전사고 대처에 있어 그들에게 기대되었던 역할도 이와 같은 부분이 컸다.
원자력안전위원회 이외에 일본에서 핵사고가 발생했을 때에 중요한 역할을 맡는 기관으로 경제산업성 자원에너지청의 원자력안전보안원이 있다. 원자력안전보안원의 임무는 핵발전의 안전 관리와 핵산업의 보안이며 2001년 처음 출범한 이후 주로 일본 내에서 발생한 핵사고들에 대한 대응을 맡아왔다(東京電力福島原子力発電所における事故調査·顕彰委員会, 2012). 원자력안전보안원은 핵사고 및 문제 발생을 사전에 방지하고 사고 발생 시에 신속하게 대처하며 사고 재발 방지 대책을 수립하는 임무를 수행해 왔다. 또한 이름과 달리 원자력뿐만이 아닌 전력, 도시가스, 고압가스, 광산 등 전체적인 에너지 분야에 있어 안전과 관련된 임무를 수행하는 역할을 해왔다. 이러한 원자력안전보안원은 핵사고 발생 시 사고 대처의 중심적인 조직으로 원자력재해대책본부의 사무국이 된다(畑村洋太郎외, 2013). 또한 사고가 발생한 해당 핵시설의 사업자는 원자력재해대책특별조치법에 따라 원자력안전보안원에 사고에 대해 보고하도록 되어 있다. 이 이외에도 일본 원자력 행정과 관련된 조직은 문부과학성, 외무성, 국토노동성, 후생노동성과 같은 기관들이 있다.

자료: 이상윤(2011)을 바탕으로 재구성
<그림 3> 일본의 원자력 행정 체계(2012년 9월 이전)

일본에서는 핵사고 발생 시 취해야 할 대응 방법과 핵사고 발생 방지를 위해 평소 사업자와 관계 기관이 행해야 하는 지침들을 법으로 정하고 있다. 원자력재해대책특별조치법은 1999년에 일본 도카이무라에서 발생한 JCO 임계사고를 계기로 제정되었다. JCO 임계사고는 핵연료를 제조하는 도카이무라 JCO우라늄가공공장에서 초산 우라닐 용액을 제조하던 도중 작업원이 규칙을 위반해 우라늄이 임계에 달했던 사고를 말한다. 사고로 인해 작업원 3명이 다량의 방사선에 피폭되어 그중 2명이 각각 약 3개월, 약 7개월 지나지 않아 목숨을 잃었다. 나머지 한 명은 치사량인 6-7 시버트에 못 미치는 1-4.5 시버트의 방사선에 피폭되어 일시적으로 백혈구 수치가 0이 되기도 했으나 후에 퇴원하였다. 이들은 1999년 10월 6일 급성방사선증으로 노동재해를 인정받았다.(주16)
또한 JCO동해사업소 반경 10km권내 주민 약 31만 명에게 실내 대피 지시가 내려졌으나 직원들과 주민들이 강한 감마선과 중성자선에 피폭되었다. 이 사고는 그 때까지 일본 내에서 발생한 핵사고 중 가장 큰 규모의 사고였기에 이후 핵사고에 대한 대책 이 강화되는 계기가 되어 그해 1999년에 원자력재해대책특별조치법이 제정되었다(東京電力福島原子力発電所における事故調査·顕彰委員会, 2011; 柳沼充彦, 2013).
원자력재해대책특별조치법의 내용을 살펴보면 핵사고를 둘러싼 각 주체들의 역 할에 대해 정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법 제 3조에서는 핵시설의 사업자가 핵사고 발생 방지를 위해 조직과 기능을 전부 동원하여 만전의 조치를 다해야 하며 사고로부터 국민과 국토를 보호해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또한 제4조에서는 국가의 책무에 대해서도 정하고 있는데 핵사고 발생 시 정부가 원자력재해대책본부를 설치하고 응급사태에 대한 대응과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제8조에서는 사고 발생 또는 확대를 방지하기 위한 조직으로 사업자에게 사업소별로 원자력재해조직 설치 및 재해관리자 선임을 의무화하고 있다.
또한 이 법의 제10조와 제15조에서는 핵시설에서 비상사태가 발생했음을 의미하 는 이른바 ‘10조 통보’와 ‘15조 통보’에 대해 정하고 있다. 제10조에서는 원자력 방재관리자가 핵시설 사업소 구역 부근에서 기준치 이상의 방사성 물질이 방출되었을 때 내각부와 원자력 규제 관련 기관에 이 사실을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를 정하고 있는데 이를 ‘10조 통보’라 한다. 제15조에서는 ‘10조 통보’보다 상황이 더 심각해진 원자력 긴급사태와 그 선언에 대한 사항들을 정하고 있다. 원자력 긴급사태는 ‘10조 통보’의 해당 사태를 원인으로 검출된 방사선량이 일본 정부에서 정한 정상적이지 않은 방사선량을 넘었을 때나 정부가 정한 원자력 긴급사태 발생을 나타내는 사고가 일어났을 경우에 해당한다.
일본 내에서 핵사고 발생 시 대처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기관은 원자력재해대책본부이다. 원자력재해대책본부는 내각 총리가 원자력 긴급사태를 선언한 후 내각부에 설치하게 되며 내각 총리가 본부장이 되어 사고에 대한 대응과 피난 지시 등을 내리게 된다.(주17) 또한 원자력재해대책특별조치법에서는 내각 총리가 원자력재해대책본부와 함께 사고 현장에 현지대책본부를 설치하고 현지대책본부장(경제산업성 부대신)이 중심이 되어 사고에 대응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특히 긴급사태응급대책거점시설(오프사이트센터)은 현지대책본부 및 재해대책본부와 같은 사고 대처 기관이 정보를 공유하여 사고 대처에 관한 지시를 조절하는 거점이 된다. 이 외에도 원자력안전위원회는 긴급 기술 자문 조직을 설치하고 총리에게 조언하도록 정하고 있다.(주18) 이와 같이 원자력재해대책특별조치법에는 핵사고 발생시 어떤 조직이 설치되고 누구를 중심으로 대처해야 하는지가 정해져 있다.
<그림 4>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발생 직후부터 2011년 3월 15일 이전까지의 사고 대응을 위해 꾸려졌던 조직도이다.(주19)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사고가 발생한 후 발전소 내 모든 전원과 냉각기능의 상실 사고에 대해 보고를 받은 간 나오토 당시 총리(이하 간 총리)는 내각부에 원자력재해대책본부(<그림 4>의 원재본부)를 설치하고 본부장이 되어 대응에 임했다. 또한 총리관저에서는 대책본부와 관저위기관리센터에 관저대책실/긴급집중팀도 꾸려졌으며 재해대책본부 사무국은 내각부에 설치되었다. 관저 5층과 관저 지하 2층에서는 도쿄전력본사에 설치된 본사대책본부의 후쿠시마원자력발전소사고대책종합본부와 정보를 교환했다. 또한 원자력재해대책본부 사무국은 원자력안전보안원에 설치되었다. 후쿠시마현에서는 현(縣) 재해대책본부가 후쿠시마현청에 설치되었고 현지대책본부(오프사이트센터)가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 사고현장에서 약 5km 떨어진 오쿠마마치에 설치되었다. 또한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와 제2핵발전소 각각에 발전소대책본부가 설치되었다. 발전소 대책본부를 지휘하는 본부장은 기존의 매뉴얼에 따라 핵발전소의 발전소장이 맡게 되었다(東京電力福島原子力発電所における事故調査·顕彰委員会, 2012).

주: *법령 등에서 재해 대응시의 제도적 위치가 지정되어 있지 않았던 조직 자료: 東京電力福島原子力発電所における事故調査·顕彰委員会(2012)
<그림 4>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와 제2핵발전소의 사고 대처 조직 개요도

다. 후쿠시마 핵발전소사고 발생 당시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 대응의 문제점

1) 사고 대응 주요 기관 관계자들의 정보 파악 부족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발생 당시 도쿄전력과 일본의 원자력 안전 규제 관련 기관과 같은 사고 당사자가 후쿠시마 핵발전소와 사고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파악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적절한 사고 대응을 취할 수 없었다.
<그림 5>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발생 직후 일본 정부의 주요한 사고 대책 조직과 정보 공개 흐름도를 나타낸다. 그림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발생 직후 일본 정부의 사고 대책의 중심은 원자력안전보안원이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발생 직후 일본 정부의 사고 대책의 중심은 원자력안전보안원이었다. 원자력안전보안원은 도쿄전력 본사에서 보내온 사고 핵반응로의 정보를 분석하고 예측을 더한 분석 정보를 작성해 관저의 원자력재해대책본부와 원자력안전위원회에 보고했다. 또한 분석정보와 핵원료 물질, 핵연료 물질 및 원자로의 규제에 관한 법률에 의거하여 도쿄전력을 지도하고 사고 대책에 대한 명령을 내렸다. 기자회견 등을 통해 국민과 해외에 대해 사고 핵반응로에 대한 평가 및 예측 사항, 분석정보를 공개한 것도 원자력안전보안원이었다.(주20)

자료: 経済産業研究所, http://www.rieti.go.jp/jp/papers/contribution/kainou/01.html
<그림 5> 사고 발생 직후(통합본부 설치 전) 일본 정부의 주요 사고 대책 조직과 정보 공개

또한 원자력안전보안원은 설립 이후 일본 내에서 발생했던 핵사고에 관한 대책을 수립하고 그와 관련하여 사업자에게 조언 및 지시를 해왔기 때문에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에서도 기술적이며 전문적인 정보와 그를 바탕으로 한 조언을 제공했어야 했다. 이번 사고에서 원자력안전보안원에게 기대되었던 역할 중 하나도 그것이었다.
하지만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발생 당시 원자력안전보안원은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설계에 대한 정보와 사고의 진행 상황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않았다(東京電力福島原子力発電所における事故調査·顕彰委員会, 2012). 2011년 3월 11일 저녁 7시경원자력 긴급사태 선언 이후 간 총리는 사고 대책을 세우기 위해 원자력안전보안원 관계자들에게 사고 상황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묻고 조언을 구했으나 그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또한 가장 먼저 설명을 위해 관저로 온 원자력안전보안원장이던 데라사카 노부아키는 학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인물로 원자력 관련 전문가가 아니었다(菅直人, 2012). 핵발전소 사고에 관해 가장 전문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할 기관의 책임자가 핵에 대해 비전문가였던 것이다.21) 또한 그를 포함한 원자력안전보안원 관계자들은 관저가 구한 질문에 대한 대답과 조언에 대해 명확하고 시원한 발언을 하지 못했다. 원자력안전보안원이 파악한 정보는 불명확하고 불분명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아예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大鹿靖明, 2013).
원전 안전 규제 기관만이 아닌 도쿄전력 역시 발전소의 교류전원이 상실되는 사고가 발생했을 당시 임원들조차 현장의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지 못한 상태였다. 사고 발생 첫 날 간 총리의 요청으로 관저에 파견된 도쿄전력 간부들에게는 현장에 대한 정보가 없었고 사고의 진행에 대한 질문을 받자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핵연료가 손상될 가능성이 있고 1-3호기의 냉각에 사용되는 배터리가 8시간 지속된다는 것과 같은 일반적이며 간단한 설명만 할 수 있었다(東京電力福島原子力発電所における事故調査·顕彰委員会, 2012).
게다가 도쿄전력에는 의사결정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회장과 사장도 사고 발생 초기에 부재 상태였고 그에 대해 정당화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東京電力福島原子力発電所事故調査委員会, 2012). 특히 또한 시미즈 마사타카 도쿄전력 당시 사장(이하 시미즈 사장)은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발생 당시 부인과 나라로 사적인 여행 중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사고가 발생했음을 전해 듣고 황급히 도쿄의 본사로 돌아오려던 그의 앞을 대지진으로 인한 교통 대란이 가로막았기 때문에 발이 묶여 한동안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大鹿靖明, 2013). 시미즈 사장은 다음 날인 3월 12일 오전이 되어서야 겨우 도쿄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1호기의 멜트다운이 3월 11일 밤에 시작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때는 이미 사고가 상당히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주22)
시미즈 사장은 2011년 3월 13일 기자회견에 모습을 보인 이후로도 한 달 동안 공개적인 석상에 나타나지 않아 비난을 받았다. 사고 대처에 있어 사장의 부재로 인해 사고의 대응이 늦어진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갖는 사람이 많아지는 한편 가쓰마타쓰네히사 당시 회장(이하 가쓰마타 회장)은 사장의 빈자리를 채우려 했다.
시미즈 사장은 사고 발생 한 달 후인 2011년 4월 11일 후쿠시마현청의 재난대책본부를 방문해 사죄하며 건강이 좋지 않아 도쿄전력 사장실 옆방에서 쉬면서 지시를 내리고 있다고 밝혔다.(주23) 가장 책임이 큰 도쿄전력 사장이 이런 행태를 보인 것은 비난받아 마땅할뿐더러 아무런 제재가 가해지지 않았다는 점도 구조적 한계라 할 수 있다. 한 달 후인 5월 20일 도쿄전력은 시미즈 사장의 사퇴를 발표했다. 하지만 후에 시미즈 사장은 도쿄전력의 관련 회사인 ‘후지석유(富士石油)’의 사외(社外) 이사로 취임한 것이 밝혀졌다(아사히신문, 2012년 6월 21일 기사).(주24)
도쿄전력의 사장 자리에서 내려왔다 해도 그 후에는 관련된 회사가 그가 있을 새로운 거취를 만들어 준 것이며 결과적으로 그는 부적합한 행동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도 않게 되었던 것이다.


2) 벤트 실시를 둘러싼 문제점

이번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에서는 격납용기의 손상을 막기 위해 1호기와 2호기, 3호기의 벤트(vent)가 시도되어 1호기와 3호기는 성공하고 2호기는 실패했다고 추정되고 있다. 벤트는 핵반응로의 냉각기능 상실로 인해 격납용기의 압력이 높아졌을 경우에 격납용기 내 방사성물질을 포함한 기체를 대기에 방출시킴으로써 격납용기가 파손되어 대량의 방사성물질이 유출되는 것과 같은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취해지는 조치이다.
2011년 3월 11일 밤 현장에서는 이미 사태가 심각해질 것을 대비해 벤트를 위한 사전 준비를 개시하고 있었다. 3월 12일 0시가 지나자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요시다 마사오 소장(이하 요시다 소장)은 1호기 격납용기의 압력이 약 5.9기압을 초과했을 가능성을 인식했다.25) 1호기 격납용기의 설계한계 압력은 4.3기압이며 정상운전 시의 격납용기 압력은 약 1기압 정도임을 고려했을 때 이는 위험한 상황에 도달할 수 있는 압력이었다.26) 이에 그는 벤트를 지시했다(東京電力株式会社, 2013).
벤트는 그전까지 일본 내에서 시도된 적이 없었으며 핵반응로의 방사성 물질을 외부 대기로 방출시킨다는 것은 일본의 핵발전소는 안전하며 방사성 물질은 절대 외부로 새지 않는다고 홍보하던 안전신화를 깨는 것과 같았다(大鹿靖明, 2013).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격납용기의 압력이 설계한계치를 넘어선 이상 도쿄전력은 벤트를 실시할 수밖에 없었다. 3월 12일 오전 1시 30분 도쿄전력의 1호기와 2호기 벤트 실시 허가 신청에 총리와 경제산업대신, 원자력안전보안원은 허가를 내렸고 아침 6시 50분에 법령에 따라 국가에서 구두로 수동 조작(핵발전소 내의 모든 전원이 상실되었으므로 원격제어를 할 수 있는 평소와 달리 수동으로 직접 밸브를 열어야 벤트를 실시할 수 있었다) 벤트 실시를 명령했다. 또한 벤트실시는 방사성 물질의 외부 방출을 수반하기에 주변 주민들의 피난 상황을 확인해야 했으므로 약 2시간 뒤인 9시 2분에 오쿠마마치 주민들의 피난을 확인하였다. 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난 10시 17분부터 벤트를 위한 조작이 시작되었으나 전원이 상실된 상태에서 벤트를 수동으로 진행해야만 했던 것과 벤트 자체를 처음 실시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조작 실패와 재시도를 반복하는 등의 난항이 이어졌다(東京電力株式会社, 2013). 이 때 도쿄전력 본점은 벤트 실시에 있어 현장에 기술적 인 조언을 하는 등의 역할이 기대되었지만 그들은 기기의 구성을 오인하거나 유 용한 조언을 하지 못하고 현장에만 판단을 맡기는 등 오히려 혼란을 가져왔다(東京電力福島原子力発電所事故調査委員会, 2012).
또한 도쿄전력 본점은 위와 같은 벤트 준비 진행 상황의 어려움에 대해 원자력 안전보안원에 보고했지만 관저까지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도 벤트가 아직 실시되고 있지 않다는 연락만 들어오자 관저 측은 도쿄전력에 대한 불신감을 갖게 되었고 결국 3월 12일 아침 간 총리가 직접 헬기를 타고 후쿠시마 핵발전소로 가서 벤트 지시를 하기 까지 이르렀다(東京電力福島原子力発電所事故調査委員会, 2012). 현장에 도착한 총리는 무토 도쿄전력 부사장, 요시다 소장과 벤트에 대한 회담을 한 후 도쿄 관저로 돌아갔다.
한 편 총리의 후쿠시마 핵발전소 시찰에는 마다라메 하루키 원자력안전위원회위원장도 함께였다. 헬기에서 현장을 내려다보던 간 총리가 위원장에게 수소폭발의 가능성에 대해 묻자 그는 “없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날 오후 3시 36분 1호기가 수소폭발을 일으키는 모습이 TV를 통해 방송되었다(닛케이신문, 2012년 2월 27일 기사).27) 이는 관저의 전문가들에 대한 불신감을 최대로 끌어올린 사건이 되었다.(주28)
앞서 언급했듯이 1호기와 2호기, 3호기의 벤트 시도 중 1호기와 3호기만 성공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벤트 성공에도 불구하고 두 핵반응로 건물에서는 수소폭발이 일어났다. 이에 대해 벤트 실시가 수소폭발의 원인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예측도 제기되었으나 도쿄전력은 이를 부정하고 있으며 진위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벤트 실시가 수소폭발의 원인이 되었다고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벤트를 실시하지 않은 4호기였다. 4호기에서 수소폭발이 일어났던 원인은 3호기에서 벤트를 실시함으로써 역류하게 되어 4호기에 들어온 수소가스였다. 핵연료의 냉각기능을 잃은 3호기의 격납용기로 새어나왔던 수소가 3호기에서 벤트가 실시된 후 비상용 가스 처리계 배관을 통해 4호기로 역류하여 4호기의 핵반응로 건물에서 수소폭발이 일어났던 것이다.(주29) 이로 인해 4호기 핵반응로 건물의 4층과 5층 부분이 심하게 손상되었다.
또한 벤트 실시가 후쿠시마 핵발전소 주변 지역의 오염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2015년 10월 일본 원자력기구는 컴퓨터를 사용한 해석을 통해 후쿠시마 핵발전소 북서쪽 방향 약 20km 정도 거리 지역의 오염이 3호기의 영향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이에 대해 도쿄전력은 그것의 원인이 3호기 벤트 실시라 보고 있다. 그들의 분석에 의하면 사고 초기 3호기 격납용기 상부에 틈이 생긴 후 벤트가 실시되어 방사성 물질이 유출된 것이 해당지역의 오염에 큰 영향을 주었다(닛케이신문, 2015년 10월 19일 기사).(주30) 그동안 도쿄전력은 벤트 실시로 인한 대기 중의 방사성 물질 방출은 극소량이라 주장해왔지만 실제로는 자연계를 오염시킬 정도였고 이는 이번 사고와 같이 핵반응로의 상황을 파악할 수 없는 것과 같은 돌발상황에서는 기존의 예측과는 상이한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3) ‘상정 외’라는 변명 뒤에 숨겨진 사전 사고 대비 부족

후쿠시마 핵발전 사고와 관련하여 일본 언론에서 가장 많이 회자된 말은 ‘상정 외(想定外)’였다(허석, 2014). 도쿄전력은 거대 지진과 쓰나미의 규모가 사고 방지 대책 수립에서 상정했던 규모를 넘어선 것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사고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도쿄전력은 2002년 토목학회의 후쿠시마현 해역(福島県沖)에서 쓰나미 지진이 발생할 가능성과 관련하여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에 도달할 수 있는 쓰나미의 최대 높이가 5.4-5.7m라는 예측 결과를 바탕으로 대책을 세웠다(<그림 6> 참조). 그러나 실제 도래한 쓰나미의 최대 높이는 이를 한참이나 넘어선 약 15m 이상으로 추정되며 그렇기 때문에 해발높이가 10m인 1-4호기 부지의 많은 부분이 침수되었다.(주31)
하지만 도쿄전력과 원자력안전보안원은 그들이 대책을 세운 5m를 넘어선 쓰나
미가 도래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2002년 토목학회에서 도래
할 수 있는 쓰나미의 높이에 대해 재평가가 이루어졌고 예측된 쓰나미의 최고 높이는 최소 9.3m에서 최대 15.7m에 육박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메이지산리쿠지진 (明治三陸地震)과 같은 규모의 지진이 후쿠시마 해상에서 발생했을 경우의 높이였다.(주32) 하지만 이러한 예측 결과에 대해 도쿄전력 간부는 실제로 그러한 쓰나미는발생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방지했고 결국 쓰나미 대책은 기존의 5.4-5.7m에 대해 취해졌던 것에서 변하지 않았다.
또한 도쿄전력은 재평가를 통해 도출된 쓰나미 최대 높이의 계산 결과를 2009년 9월과 2011년 3월 7일의 두 차례에 걸쳐 원자력안전보안원에 보고했다. 사고가 발생하기 불과 나흘 전인 2011년 3월 7일 도쿄전력 직원들은 상정을 넘어서는 쓰나미가 도래할 가능성이 존재하고 최대 높이 10m가 넘는 쓰나미가 덮치면 육지에서는 파고가 10m 이상이 될 수 있다는 예측이 담긴 자료를 원자력안전보안원에 보여주었다. 자료에는 이와 같은 거대한 쓰나미에 대한 대비책을 2012년 10월에 세운다는 계획이 적혀 있었다(大鹿靖明, 2013).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대책은 기존에 세워졌던 5.4-5.7m 높이기준에서 변경되지 않아 새로운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고 원자력안전보안원 역시 도쿄전력의 이러한 행태를 묵인했다(東京電力福島原子力発電所における事故調査·顕彰委員会, 2012; 東京電力福島原子力発電所事故調査委員会, 2012). 상정을 넘어서는 거대 쓰나미가 핵발전소를 덮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사고가 발생하기 전 약 10년이나 전부터 알고도 도쿄전력과 원자력안전보안원은 대책을 미뤄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발생 가능성의 문을 활짝 열어두었던 것이다.
또한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당시에는 지진과 쓰나미뿐만이 아닌 기존에 상정하지 않았던 여러 상황들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적합한 대처가 이루어지지 않은 항목이 다수 존재하며 이는 사고의 피해를 확대시킨 원인으로 작용했다.

자료: 도쿄전력 홈페이지
<그림 6> 후쿠시마 핵발전소 부지 높이와 쓰나미 이미지

도쿄전력의 전원 상실 대책은 인접한 핵반응로 중에서 하나는 전원이 온전할 것이라는 전제 하에 세워졌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의 경우와 같이 13개의 비상 발전기들 중 하나만이 정상적으로 가동되었던 상황, 즉 여러 기의 전원이 장시간 상실되는 사고가 발생했을 시의 대처에 필요한 매뉴얼과 기자재도 없었고 이에 대비한 사원교육도 실시하지 않았다(畑村洋太郎 외, 2013).
사고 발생 당시 모든 전원이 상실된 발전소 내에는 조명이 들어오지 않아 작업원들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기기와 밸브 등을 조작하고 전원을 복구하는 작업을 해야 했다. 평소라면 원격 제어할 수 있는 동작들도 전원이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작업원들이 방사선량이 높아져가는 현장에 직접 들어가 수동 조작해야 하는 등의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또한 냉각기능 상실 시에 바닷물을 직접 핵반응로로 주입할 경우가 생길 수 있는데 후쿠시마 핵발전소에도 이에 대비하여 소방차가 배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도쿄전력은 최종적으로 핵반응로에 해수를 주입해야 할 사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였기 때문에 구체적인 계획이 세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발생 당시에는 1-3호기가 냉각을 위한 주수 기능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임시로 소방차를 사용하여 핵반응로에 해수를 주수해야만 했다. 하지만 3월 12일 1호기 수소폭발의 여파로 현장의 작업원들이 부상당하고 소방호스가 파손되는 등 해수주입 작업 준비에 지장이 생겼다. 또한 거의 복구되어 가던 일부의 전원들이 수소폭발로 인해 작업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일이 생기는 등 혼란이 일어났다(畑村洋太郎 외, 2013). 수소폭발 자체도 있어서는 안 되는 비극적이고 큰 사고였지만 그것이 사고 대처와 수습에도 악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요시다 소장은 이미 3월 11일 사고 발생 이후 일찍부터 소방차를 통한 주수를 생각하고 도쿄전력 각 조직에 검토 지시를 내렸으나 전문분야별로 역할이 세분화되어있던 조직들은 그것이 매뉴얼에서 정하고 있는 사항이 아니며 자신들의 소관이 아니라 생각하여 결국 다음날 새벽까지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실제 주수에 있어서도 어느 팀이 주수를 해야 할지 불명확하다는 문제가 있었다(東京電力福島原子力発電所事故調査委員会, 2012).
상정하지 못했던 상황은 외부로부터의 전원 공급에 있어서도 발생하여 사고 대응을 어렵게 했다. 기능을 상실한 발전소 내 전원을 대신하여 전기를 공급해 줄 전원차가 도쿄전력뿐만이 아닌 도호쿠전력, 자위대 등으로부터 70여 대가 제공되어 후쿠시마 핵발전소를 향해 출발했지만 여러 예상치 못한 상황들의 발생으로 인해 대부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전원차가 도착한 발전소에는 쓰나미로 인한 잔해들이 흩어져 있어 전원차가 움직이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고 소방차까지 합세하여 큰 혼잡이 벌어지고 있었다. 또한 케이블을 연결해야 할 배전반이 물에 잠겨 사용할 수조차 없었다. 3월 11일 저녁 9시 이후에 도착한 자위대의 전원차는 케이블 접속용 기기가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쓰이는 것과 달라 실제로 전원 복구에 사용될 수 없어 이 또한 헛수고였다. 다음 날인 3월 12일 오후 3시 경에는 2호기의 배전반에 케이블을 연결시켜 전원을 공급시킬 준비가 어느 정도 완료되었지만 얼마 후 발생한 1호기의 수소폭발에 의해 케이블이 손상을 입어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東京電力福島原子力発電所における事故調査·顕彰委員会, 2011).
또한 이번 사고 대처를 적합하게 할 수 없게 된 원인들 중 하나가 오프사이트센터를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오프사이트센터는 일본 전역의 핵사업소 20여곳마다 설치되어 있으며 이번 사고의 초기 대응에 사용되었던 오프사이트센터는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에서 약 5km 떨어진 오쿠마마치에 설치되었다.33) 하지만 지진과 쓰나미로 인해 재해지와 피난민들이 모인 곳은 식량 및 물자, 연료 등의 부족에 직면하게 되었고(藤原幾磨 외, 2013), 이는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오프사이트센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사고가 발생한 지 이틀 뒤인 2011년 3월 13일부터 오프사이트센터 내에서도 물자가 부족해지기 시작해 사고 대처에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東京電力福島原子力発電所における事故調査·顕彰委員会, 2012).
2011년 3월 14일 1호기에 이어 3호기에서 폭발이 발생한 후 관계자들은 오프사이트센터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오프사이트센터에 방사성 물질을 차단시켜 줄 공기정화필터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3호기 폭발과 함께 급증한 방사선량으로 인해 그들은 다음 날인 3월 15일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약 60km 이상 떨어진 거리의 후쿠시마현청으로 이전해야만 했다.
이 오프사이트센터의 공기정화필터의 미설치는 사고 발생 전에도 이미 지적된 적이 있었다. 2009년 일본 총무성에서 22곳의 오프사이트센터를 조사해 본 결과 13곳의 오프사이트센터가 피폭방사선량을 저감시켜줄 대책이 확실하지 않기에 실제로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할 우려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는데 그 중 한 곳이 후쿠시마의 오프사이트센터였다(総務省行政評価局, 2009). 총무성은 이에 대해 개선권고를 내렸지만 이를 소관하고 있던 원자력안전보안원은 대책에 대해 논하지 않았고 그 결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발생한 지 4일 만에 후쿠시마의 오프사이트센터는 높아진 방사선량 때문에 사고에 대응할 수 없는 환경이 되어 버렸다. 이는 사고 대처에 필요한 정보 수집이 더욱 난항을 겪은 원인들 중 하나가 되었다. 이렇듯 오프사이트센터가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총리관저에서는 부족한 정보를 바탕으로 사고에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東京電力福島原子力発電所における事故調査·顕彰委員会, 2012).

4) 대처에 관련된 사람들의 피폭위험과 책임의 문제

3호기가 폭발한 3월 14일 밤부터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요시다 소장은 2호기의 압력용기나 격납용기의 손상으로 인해 방사성물질이 대량 방출되어 도쿄전력의 직원들과 핵발전소 관련 기업의 직원들이 대량 피폭당할 가능성을 깨닫고 고민했다. 그는 도쿄전력 본사의 긴급시대책본부에게 플랜트 제어에 필요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현장에서 대피시키도록 하는 것에 대해 의논했다. 이를 전해들은 시미즈 사장은 원자력안전보안원장, 경제산업대신, 관방장관에게 전화하여 ‘2호기가 심각한 상황이다. 앞으로 상황이 더욱 악화될 경우에는 철수하여 대피하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미즈 사장이 전화 통화 시에 ‘플랜트 제어에 필요한 사람을 제외한다’는 현장의 조건을 말하지 않았으므로 경제산업대신과 관방장관은 도쿄전력이 ‘모두’ 철수한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당시 이미 2기의 핵반응로에서 폭발이 일어났고 2호기에서도 언제 큰 일이 생길지 모르는 상황에 그것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이야기였을 것이다. 누구보다 현장에 대한 정보를 잘 아는 그들이 철수한다면 일본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빠질 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냥 그들에게 피폭의 위험을 감수하고 사고 대처를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관방부장관,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장, 보안원 관계자 등은 회의를 통해 플랜트 대응에 대해서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모두 의견을 모았다. 사고와 관련하여 당시 언론에 모습을 자주 비추었던 에다노 유키오 전 관방장관은 최종판단자인간 총리에게 이에 대해 의견을 물었고 총리는 ‘도쿄전력의 철수는 인정할 수 없다’고 답했다. 그는 ‘도쿄전력이 현장에서 철수한다면 제1핵발전소의 핵반응로는 물론이고 제2핵발전소의 핵반응로까지 제어할 수 없게 되어 대량의 방사성물질이 대기 중으로 방출될 것이라 예상한다.’며 전원 철수를 수용하지 않았다(東京電力福島原子力発電所における事故調査·顕彰委員会, 2012).
전원 철수 불수용과 함께 간 총리의 도쿄전력에 대한 불신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는 시미즈 사장을 관저로 불러 현장에서 작업하고 있는 전원이 철수하지 않을 것임을 확인하고 도쿄전력 본점에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통합대책본부’ (이하 통합본부)를 설치하여 사고 대처에 임하고 싶다는 의견을 냈다. 사장도 이에 찬성하였다(東京電力福島原子力発電所における事故調査·顕彰委員会, 2012).
하지만 3월 15일 오전 6시 경 2호기에서 큰 폭발음이 들려왔다. 2호기 격납용기의 압력은 0Mpa를 가리키고 있었다. 냉각이 불가능했고 벤트 시도조차 실패했던 2호기의 격납용기에 치명적인 문제가 생긴 것임이 분명했다. 요시다 소장은 도쿄 전력 본사에 ‘작업과 관련된 요원들을 제외하고 모두 후쿠시마 제2핵발전소로 대피하겠다’는 팩스를 보냈다. 그 후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에 있던 약 650명의 사람들 중 70명 정도가 남아 목숨을 건 작업을 지속했다. 후에 이들은 ‘후쿠시마 최후의 50인’이라 불리며 칭송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20명 정도 많은 약 70명이었다(大鹿康明, 2013). 당직 팀장과 같은 베테랑 직원들이 현장에 남아 작업했으나 그날 오전 2호기 주변에서 관측된 방사선량은 400mSv로 인간이 15분 이상 작업할 경우 치명적인 수치였다(중앙일보, 2011년 3월 16일 기사).(주34)
이처럼 목숨을 걸고 현장에서 사고 대처를 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일부 원자력안전보안원 직원들은 자신의 안전만을 생각하여 행동하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고 발생 당시 후쿠시마 핵발전소에는 정기검사를 위해 원자력안전보안원 직원 8명이 파견되어 있었는데 사고 발생 후 3명이 오프사이트센터로 이동하였고 3월 12일 새벽에는 방사선량이 치솟음에 따라 나머지 직원들마저 오프사이트센터로 이동해버렸다. 현장에 원자력안전보안원 직원들 중 아무도 남지 않게 된 것이었다. 이를 염려한 현지대책본부가 3월 13일 아침에 원자력안전보안원에서 직원 4명을 파견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주어진 임무 중 하나인 정보수집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3월 14일 오후 5시경에는 자신들의 위험을 걱정해 후쿠시마 핵발전소를 탈출하고 말았다(畑村洋太郎 외, 2013).

(5) 사고 후 주민 대처에 있어 지자체 대응의 문제점

이번 사고에서 주민들의 피난이 이루어졌을 시 해당 지자체가 취했던 대응에서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고 그로 인해 피해가 가중되거나 혼란이 야기되었다는 점도 살펴보아야 할 지점이다. 일본 지자체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 대처의 문제점은 크게 병원 환자와 의료진에 대한 피난 조치와 요오드제 배포, 두 가지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다.
후쿠시마 원전에서 남서쪽으로 약 4.6km 거리에 있는 후타바병원에서는 지자체의 피난 대처가 적절하지 않아 2011년 3월 한 달 동안 환자 50명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2011년 3월 12일 오전에 내려진 반경 10km 권내 피난지시에 따라 오쿠마마치에서는 후타바병원에 피난용 대형 버스 5대를 보냈고 이 버스에 스스로 걸을 수 있는 환자 209명과 스텝이 탑승하여 오후 2시경부터 피난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관계자들은 남아있는 사람들을 파악하지 않은 채 피난을 진행시켰고 후타바병원에 환자 약 130명과 스즈키 이치로 병원장(이하 스즈키 원장)이, 후타바병원 계열 노인요양시설인 드빌후타바에 98명의 환자와 직원 2명이 남아 피난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오쿠마마치에서는 버스를 보낸 것만으로 후타바병원의 피난이 모두 완료되었다고 판단하여 후에 상황을 정확히 확인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3월 13일의 시점까지 후쿠시마현 지역방재계획에는 주민피난안전반과 구조반, 피난 담당 부서가 후쿠시마현 재해대책본부 내에서도 여러 반으로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피난 실시 시에 누가 입원환자를 파악해야 하는지 정해져 있지 않았다(畑村洋太郎 외, 2013). 3월 13일 오전이 되어서야 후쿠시마현 재해대책본부는 후타바병원과 드빌후타바에 구출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후쿠시마현 재해대책본부는 자위대에게 구출 및 피난처로의 이송을 요청했으며 추가 피난이 3월 14일부터 3월 16일까지 이루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환자들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게다가 시설 특성상 피난하지 못한 채 남아있던 환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치매와 같은 질환을 앓고 있어 거동이 불편한 상태였기에 그것을 고려한 피난 방법을 택해야 했지만 후쿠시마현 재해대책본부에서는 이러한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고 오히려 정신과 병원이기 때문에 환자들이 체력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다(東京電力福島原子力発電所における事故調査·顕彰委員会, 2012).
구조되지 못한 환자들이 남아있는 동안 후타바병원은 수도와 전기, 가스가 모두 끊긴 상태였다(요미우리 신문, 2014년 9월 12일 기사).(주35) 전기가 끊어진 병원은암흑이었던 데다가 환자들과 함께 피난을 갔던 스텝들이 다시 병원으로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스즈키 원장 한 명이 남은 환자들을 모두 돌봐야 했다. 하지만 후쿠시마현에서는 2011년 3월 17일에 “3월 14일부터 16일에 걸쳐 구출을 했으나 그때 병원관계자들은 한 명도 남아있지 않았다.” 라는 거짓 발표를 했고 이에 대해 4년이 지난 2015년 10월 23일 스즈키 원장에게 후쿠시마현 지사가 뒤늦게 사과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주36)
위의 후타바병원 사례에서 지자체의 치밀하지 못한 피난 계획과 실시, 원활하지 못했던 정보 공유로 인해 피난에 차질이 생겼던 것을 검토할 수 있었다. 또한 후쿠시마현 지역방재계획에서 피난환자 확인과 같은 역할이 나누어져 있지 않았다는 허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희생자를 발생시킬 수 있는 요소로 실제로 후타바병원에 있던 무고한 환자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게다가 이런 실책을 무마하기 위한 후쿠시마현의 거짓 발표에 병원 측도 한동안 오명을 쓸 수밖에 없었다.
방사성 물질로 인한 주민들의 건강상의 피해를 막을 수 있는 요오드제의 배포에 있어서도 지자체 대응에 문제점이 존재했다. 방사능에 노출되기 전에 요오드제를 복용하면 방사성 물질인 요오드131이 갑상선에 농축되는 것을 막는 작용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요오드제는 피폭당하기 전에 복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후쿠 시마현에서는 원전 반경 50km 권내 모든 지자체의 40세 미만 주민들에 대해 3월 14일부터 요오드제 배포를 실시해 20일에 마쳤는데 3월 14일에는 이미 사고가 많이 진행되었고 3월 15일에 가장 많은 양의 방사성 물질이 확산되었던 것을 고려하면 때늦은 대처였다고 할 수 있다(畑村洋太郎 외, 2013). 또한 3월 14일 밤 후쿠시마 원전으로부터 반경 50km 권내의 미하루마치에서는 사고의 진행에 따른 주민들의 피폭 가능성을 예상하고 자율적으로 요오드제 배포와 복용 지시를 결정하여 15일 오후 1시경 배포를 실행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후쿠시마현 보건복지부 지역의료과 직원이 국가로부터 지시가 없었다는 이유로 미하루마치에 요오드제 배포 중지 및 회수 지시를 내렸다. 요오드제의 복용은 국가의 재해대책본부의 판단을 통해 이루어지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민들의 건강상 피해를 염려한 미하루마치는 이에 따르지 않았다(東京電力福島原子力発電所における事故調査·顕彰委員会, 2012). 이 사례를 통해 후쿠시마현의 늦은 대응과 형식에 집착한 지시 방식이 사고 피해를 증폭시킬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국가 단위에서 요오드제를 배포할 것을 정해놓은 규칙도 실제 사고에서는 적절하게 기능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6) SPEEDI 결과 공표 시기의 문제점과 피난민들의 피해

일본에는 특정한 핵시설에서 사고가 발생했을 시 방사성 물질이 어떤 방향으로 얼마나 유출될지 예측하는 시스템이 있다. 긴급시신속방사능영향예측네트워크시스템(SPEEDI)은 일본원자력개발기구에서 미국의 쓰리마일섬 핵발전소 사고를 계기로 개발한 시스템으로 핵시설에서 대량의 방사성 물질이 방출되거나 그렇게 될 위험성이 존재할 때 방출원의 정보, 기상조건, 지형 데이터를 토대로 해당 핵시설 주변 환경의 대기 중 방사성물질의 농도나 피폭선량과 같은 수치를 예측할 수 있다.(주37) 또한 핵사고가 발생했을 경우에 SPEEDI를 사용함으로써 방사성 물질이 ‘언
제’ ‘어떤 방향으로’ ‘어느 정도’ 날아갈 것인가를 방출원의 정보, 지형, 기상상황을 계산하여 결과를 얻을 수 있다(畑村洋太郎 외, 2013). 이러한 SPEEDI는 1999년 JCO 임계사고가 발생했을 때에 사용되어 방사성 물질의 유출 정보를 예측했다.
<그림 7>은 SPEEDI와 관련된 정보의 흐름을 나타내고 있다. 원자력안전기술센터에서는 일본기상학회로부터 기상정보를 받고 문부과학성, 지방공공단체와 피드백을 하여 정보를 오프사이트센터에 전달한다.

자료: NUSTEC, http://www.nustec.or.jp/
<그림 7> SPEEDI 정보의 흐름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발생 당시 원자력안전보안원은 3월 11일 오후 9시 12분에 사고 후 처음으로 SPEEDI를 가동시키기 시작했고 16일까지 총 45번 방사성 물질의 확산 상황을 예측했다. 문부과학성도 12일부터 16일까지 방사성 물질의 확산 상황을 38번 SPEEDI를 사용하여 계산했고 원자력안전위원회도 12일에 적어도 한 번 SPEEDI를 통해 결과를 얻었다. 하지만 이렇게 90회 가까이 이루어진 SPEEDI 계산 결과는 관저에 일부 전달되었으나 간 총리에게는 한 번도 전달되지 않았다(大鹿靖明, 2013). 또한 사고가 발생한 지 12일이 지난 3월 23일 원자력안전위원회에 의해 공표될 때까지 일본 국민들에게 SPEEDI의 계산 결과는 한 번도 전달되지 않았다(東京電力福島原子力発電所における事故調査·顕彰委員会, 2012).
그렇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SPEEDI 계산 결과를 처음부터 공개하지 않은 것에 대해 많은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는 사고에 따른 피난 대응 실패의 대표적인 사례로 일본 언론과 국회에서 비판을 받았다(茅野政道, 2014). SPEEDI 정보를 주민들의 피난이 이루어질 때에 공개하지 않은 탓에 피난민들이 오히려 방사성 물질의 농도가 높은 곳으로 피난을 하게 되는 등 피해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로부터 반경 10-20km 거리에 해당되는 나미에마치의 경우 방사성 물질의 대량 방출이 발생했다고 추정되는 2011년 3월 15일에 주민들의 순차적인 피난이 이루어졌다. 일본 정부가 방사성 물질에 대한 정보를 공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민들은 스스로 피난방향을 정하여 움직여야 했고 후에 SPEEDI의 계산 결과 발표를 통해 일부 주민들이 이동한 방향이 방사성물질의 이동방향과 겹치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카호쿠신보, 2014년 11월 25일 기사).38) 이러한 사태는 나미에마치의 바로 북쪽에 위치한 미나미소마시에서도 발생했다. 처음부터 SPEEDI의 정보를 공개했다면 주민들이 방사성 물질의 농도가 높은 방향으로 피난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畑村洋太郎 외, 2013).
그렇다면 SPEEDI의 예측 결과가 활용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SPEEDI를 통해 계산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방출원의 정보가 필요하며 이러한 정보를 수집하여 보내는 것이 긴급시대책지원시스템(ERSS)이다. 하지만 이번 사고에서는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전원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ERSS를 활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SPEEDI를 활용하면 ERSS로부터 방출원 정보를 얻지 않아도 방사성 물질의 단위량 방출을 가정하여 계산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사고에서도 ERSS의 기능이 멈춘 상태에서도 SPEEDI의 정보는 계속 입수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고의 관계자들은 모두 ERSS가 기능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SPEEDI를 사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누구도 활용하려 하지도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계속 입수되고 있었던 SPEEDI의 정보는 활용되지 못하였다. 문부과학성은 2011년 3월 15일 기자회견에서 보도관계자로부터 SPEEDI의 정보 공개를 요구받았지만 그 자리에서 공개 여부를 결정하지 않았다. SPEEDI의 결과가 처음으로 공표된 것은 사고가 진행되고 한참이나 지난 2011년 3월 23일이었다(東京電力福島原子力発電所における事故調査・検証委員会, 2012).
<그림 8>의 왼쪽 그림은 후에 공개된 SPEEDI의 2011년 3월 12일 오전 0시의 적산피폭량 예측 결과이다. 이를 보면 적산피폭량이 후쿠시마 원전에서 북서쪽 방향으로 갈수록 증가함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림 8>의 오른쪽 그림은 2011년 4월 29일에 미국이 측정한 공중 방사능 농도를 나타낸다. 이 결과 역시 후쿠시마 핵발전소로부터 북서쪽 방향으로 갈수록 방사능의 농도가 상승함을 나타내고 있다. 이를 통해 사고 당시 SPEEDI를 통해 계측되었던 결과의 정확도가 높음을 알수 있고 SPEEDI 예측 결과를 초기에 공표했다면 주민들의 피난에 혼란을 막고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적시에 SPEEDI의 예측 결과를 공표하지 않아 후쿠시마 핵발전소 주변 지역의 주민들이 방사성 물질 피폭을 피할 방법을 제공하지 않았다. 일본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잃는 계기를 스스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자료: 은종화, 2011
<그림 8> SPEEDI의 계측 결과(좌)와 미국의 공중 방사능 측정 결과

라. 마치며

지금까지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발생한 사고에 대한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의 대응 사례를 검토해 보았다. 이번 사고에서는 사고 대처에 필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할 도쿄전력과 원자력안전위원회, 원자력안전보안원이 사고의 진행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않았고 향후의 진행 방향에 대해서도 제대로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적합한 대처를 할 수 없었다. 또한 현장의 상황이 관저에 충분히 전달되지 않아 사고 대처의 효율을 저하시켰고 현장의 상황에 대한 오해를 낳았다. 게다가 현장에서는 평상시에 예상하지 못하여 대비하지 않았던 여러 상황들이 사고의 원인이 되거나 사고 대처에 지장을 줌으로써 피해를 확대시켰다. 하지만 무엇보다 현장에서 직접 사고에 대응하는 관계자들의 피폭 위험과 사고 수습 중 어느 것에 무게를 둘지를 결정하는 것이 어려운 문제였다. 끝까지 남아 사고 대처에 임했던 사람들이 있었던가 하면 현장에서 정보를 수집해야 하는 원자력안전보안원 일부 직원들이 현장을 버리고 도망가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여줬다.
이번 사고와 같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규모의 핵사고가 발생했을 시에는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인해 적절한 판단과 대처를 못할 확률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 다양한 경우를 고려하여 대비하지 않으면 사고 발생 시 피해를 확대시킬 뿐만 아니라 대비하지 않은 것 자체가 사고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명확한 사실은 핵발전 기술에는 인간이 아무리 대비를 한다고 하더라도 모든 가능성을 다 판단하고 그에 대처할 수 있는 모든 대비책을 마련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본질적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핵발전소를 확대해 나가는 것은 위험을 자초하는 길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가동 중인 핵발전소들이 존재하고 있기에 현재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은 신규 핵발전소를 더 이상 건설하지 않으면서 현재 가동 중인 핵발전소들에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사고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적절한 대비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사고가 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만의 하나 사고가 발생할 경우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보다 철저한 준비가 요구된다, 이 글에서 지면의 한계나 맥락상 제대로 다루지 못한 일반 대중에 대한 정보 제공의 시기와 내용, 방식에 대해서는 보다 적극적인 준비가 필요하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는 끝난 것이 아니라 아직 진행 중이며 앞으로 더욱 넓은 범위에 걸쳐 많은 수의 피해자를 발생시킬 가능성이 크다. 사고 5주기를 앞둔 지금 핵발전소 대국으로서 한국은 후쿠시마의 참혹함을 잊어서는 안 되며 그 잘못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후쿠시마와 달리 월성 핵발전소 및 고리 핵발전소가 부산, 울산과 같은 대도시와 굉장히 가까운 거리에 입지해 있다. 만일 이들 발전소에서 후쿠시마와 같은 사고가 발생한다면 약 50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즉시 위험에 노출되고 대피과정에서 큰 혼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후쿠시마 핵발전소와 한국의 핵발전소는 노형이 다르기 때문에 한국은 안전하다는 말은 너무나 안이한 발상이다.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 직후 일본의 노형은 체르노빌의 노형과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했지만 바로 그 일본에서 사고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사고는 인간의 인식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올 수 있음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한다.
더 이상 핵발전소를 건설하지 않으면서 다른 한 편으로 가장 우선되어야 할 일은 사고 발생을 예방하기 위해 사전에 철저히 대책을 세우고 실시하는 것이다. 각 핵발전소의 안전 점검 기준을 후쿠시마의 사고 사례를 참고하여 더욱 엄격히 수정하는 것이 사고 예방에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핵발전소 부지에서의 지진이나 쓰나미와 같은 자연재해의 발생 확률을 정확히 평가하고 대비해야 하며 사고 발생 시의 대처 훈련 및 주민들의 피난 훈련도 정기적으로 실시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어떤 기관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사고 발생 시 어떻게 역할을 분담하면서 협력할 것인지, 사고 대처 인력은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등 보다 구체적인 계획이 필요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엄청난 양의 핵연료를 장전한 핵발전소는 가동 중이다. 하지만 우린 지금 한국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고의 가능성을 어디까지 상정하고 있고 어디까지 대처하고 있는 걸까? 충분한 조치를 취하고 있기에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과 원자력 안전신화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보다 적극적인 대비책을 마련하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주1) 이 글은 윤순진 교수의 지도로 최종민이 작성한 서울대 환경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조직화된 무책임을 통해 본 후쿠시마 원전사고) 일부를 수정 보완한 것이다.
주2)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에서 남쪽 방향으로 약 11.5km 떨어진 거리에 같은 회사인 도쿄전력에서 운영하는 후쿠시마 제2핵발전소(福島第二原子力発電所)가 존재한다. 후쿠시마 제2핵발전소는 제1핵발전소와 달리 동일본대지진 발생 후 모든 핵반응로가 냉온정지에 성공하여 큰 피해가 없었고 후에 INES 3등급 판정(Serious Incident)을 받는 것으로 그쳤다. 이는 쓰나미 도달 후에도 외부 전원을 통해 전기를 공급받을 수 있었고 그로 인해 핵반응로 내부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장에서 후쿠시마 핵발전소로 표기하는 것은 모두 후쿠시마 제1핵발
전소를 가리킨다. 또한 핵발전은 원자핵을 인위적으로 분열시킬 때에 방출되는 에너지를 이용하여 전기를 생산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원자력발전이라는 별도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원자 내 핵의 분열을 통해 에너지를 얻
기 때문에 핵발전이라는 용어가 과학적으로 타당하고 우리나라와 일본을 제외한 서구 및 중화권에서는 이 용어가 사용되고 있기에 이 장에서도 특정 행정 기관명, 관련 정책 및 법 등을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원자가 아니라 핵을 사용하여 관련 용어들을 표기하기로 한다.
주3)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의 핵반응로는 모두 GE(General Electric)가 설계한 비등수형경수로(Boiled Water Reactor, BWR)이다. 하지만 격납용기의 유형에서 차이가 나는데 1호기부터 5호기까지는 모두 같은 마크Ⅰ형 격납용기이며 가장 늦게 완공된 6호기만 마크Ⅱ형 격납용기로 설계되어 있다.
주4) 4호기 수소폭발의 이유에 대해서는 뒤에 나올 3절 2)에서 다룬다.
주5) MOX 연료는 Mixed-Oxide의 약자로 사용후 핵연료에 남아있는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화학적 처리를 통해 추출하여 섞어서 새로 만든 연료를 뜻한다. 보통 핵발전소에서 사용하는 우라늄 핵연료에는 핵분열을 일으키기 쉬운 우라늄 235가 약 3-5% 정도 포함되어 있고 나머지는 핵분열을 일으키기 어려운 우라늄 238 등이 차지하고 있다. 이에 비해 MOX 연료에는 플루토늄이 약 4%에서 많게는 약 10%까지 함유되어 있으며 연료의 나머지는 핵 분열이 어려운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서 사용되는 플루토늄은 우라늄 연료를 핵분열시켜 발전했을 때 생성되는 플루토늄에서 얻은 것이다. 또한 핵발전소에서 이러한 MOX 연료를 사용하여 운전하는 것을 ‘플루서멀’ 이라고 한다. 도쿄전력은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 3호기의 플루서멀을 2010년 9월부터 실시하던 중이었다.
주6) 도쿄전력 홈페이지, http://www.tepco.co.jp/nu/fukushima-np/outline/2_5-j.html
주7) 일본 경제산업성 자원에너지청 홈페이지,
http://www.enecho.meti.go.jp/about/faq/009/pdf/45.pdf
주8) 일본 수상관저 홈페이지, http://www.kantei.go.jp/saigai/senmonka_g66.html
주9) 2012년 5월에는 16만 4865명이었다.
후쿠시마현 홈페이지, http://www.pref.fukushima.lg.jp/site/portal/list271.html
주10) 후쿠시마현 홈페이지, https://www.pref.fukushima.lg.jp/sec/11045b/27kokuseisokuhou.html
주11) 닛폰TV, “今年の福島第一原発 廃炉作業の現状と展望”(2016-1-2)
주12) 도쿄전력 홈페이지, http://www.tepco.co.jp/
주13) 235란 숫자는 핵발전의 원료인 우라늄-235를 상징적으로 사용한 것이라고 함(윤순진・김소연・정민지, 2011).
주14) Japan Atomic Energy Comission, http://www.aec.go.jp/jicst/NC/about/hensen. htm
주15) 2012년 9월 19일에는 원자력안전위원회와 원자력안전보안원이 폐지되고 원자력규제위원회가 새로운 원자력 규제 기관으로서 발족되었다.
주16) 「よくわかる原子力」 홈페이지, http://www.nuketext.org/jco.html/
주17) 일본 수상관저 홈페이지, https://www.kantei.go.jp/jp/singi/genshiryoku/
주18) e-Gov, http://law.e-gov.go.jp/htmldata/H11/H11HO156.html
주19) 2011년 3월 15일 이후에는 사고 현장에서 약 5km 떨어진 오쿠마마치에 설치되어 있던 오프사이트센터가 높아진 현장의 방사선량으로 인해 현장에서 60km 이상 떨어진 거리의 후쿠시마현청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또한 도쿄전력 본사에 정부와 도쿄전력의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대책 통합본부가 설치되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자세한 사항은 3절의 3)과 3절의 4)를 참조하기 바란다.
주20) 経済産業研究所, http://www.rieti.go.jp/jp/papers/contribution/kainou/01.html
주21) 간 나오토는 2014년 10월 11일 우리나라 국회에서 열린 ‘후쿠시마를 넘어 탈핵으로’ 강연회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일본법에 의하면 원자력 재해대책본부를 꾸려야 했고, 본부장은 총리대신이 맡게 되어 있다. 여기의 관료조직은 경제산업성의 원자력안전보안원이 있고, 여기의 기관장에게 상황와 예측, 대책에 대한 질문을 했다. 하지만 설명을 들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설명하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제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둘 중에 하나였다. 내가 물었다. 당신은 원자력 전문가인가. 그는 도쿄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다고 답했다. 경제산업성이니 경제전문가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원전사고 당시 핵심 역할의 기관장이 원전에 대해 비전문가였다는 점에 놀랐다. 그는 예산과 법률에 대해선 유능했겠지만 원전은 전혀 대비하지 못했고, 그를 중심으로 그러한 체제가 꾸려졌다.” 생태지평 홈페이지 인용. http://ecoin.or.kr/xe/energy/13042
주22) 시미즈 사장은 2011년 6월 사장직에서 물러나 현재까지 도쿄전력 고문직을 맡고 있다.
주23) 조선일보, “도쿄전력 사장, 한달 만에 나타나 “죄송”(2011-4-12)
주24) 아사히신문, “東電役員8人、引責退任後「天下り」 グループ社などに”(2012-6-21)
주25) 요시다 소장은 사고 발생 이후 식도암이 발견되어 2011년 11월 입원했고 그 다음 달에 소장직을 퇴임했다. 입원 후 2년이 지나지 않은 2013년 7월 9일 요시다 소장은 사망했고 도쿄전력은 그의 식도암 발병에 대해 사고로 인한 피폭이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주장하고 있다. 닛케이신문, “東電福島第1原発の元所長、吉田氏が死去 58歳”(2013-7-9)
주26) 日本科学未来舘, https://www.miraikan.jst.go.jp/sp/case311/docs/Events_Fukushima_J.pdf
주27) 닛케이신문, “官邸の介入強めた班目発言 「水素爆発ない」 東電は再三の撤退申し入れ 民間事故調報告”(2012-2-27)
주28) 후에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원자력안전보안원과 함께 핵사고 방지를 위한 대책마련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대처에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2012년 9월 18일 폐지되었고 마다라메 위장과 데라사카 보안원장의 후임이던 후카노 히로유키 보안원장도 퇴임했다. 또한 다음날 새로운 원전 안전 규제기관으로 원자력규제위원회가 출범하여 원자력 안전 관리 개혁을 통해 일본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고 일본의 원자력에 대한 국내외의 신뢰를 회복할 것이라는 목표를 제시했다. 원자력규제위원회는 환경성의 외국(外局)으로서 설립되었고 사무국으로 원자력규제청을 두고 있다. 설립 이후 원자력 인재 육성과 핵반응로 안전 문제, 핵연료의 안전 문제, 방사선 심의에 관해 전문 심의회를 두고 심의를 하고 있다.
주29) 도쿄전력 홈페이지, http://www.tepco.co.jp/nu/fukushima-np/outline/2_10-j.html,
원자력규제위원회 홈페이지, https://www.nsr.go.jp/data/000048783.pdf
주30) 닛케이신문, “福島原発北西側の汚染、3号機ベントも一因か 原子力機構が分析”(2015-10-19)
주31) 도쿄전력 홈페이지, http://www.tepco.co.jp/
주32) 1896년 6월 15일 산리쿠(三陸) 바다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인해 대규모의 쓰나미가 육지에 도래하여 일본 도호쿠지방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약 2만 2천명의 사상자와 1만 채 이상의 주택을 파괴시킨 일본 쓰나미 재해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피해를 발생시킨 지진이다.
일본 내각부 홈페이지,
http://www.bousai.go.jp/kyoiku/kyokun/kyoukunnokeishou/rep/1896-meiji-sanrikuJISHINTSUNAMI/
주33) 일본 경제산업성 홈페이지,
http://www.meti.go.jp/committee/materials/downloadfiles/g71011d11j.pdf
주34) 중앙일보, ““원전 폭발 막아라” … 15분에 목숨 걸고 방사능과 싸우는 ‘최후의 50인’(2011-3-16)
주35) 読売新聞, 避難先で死亡は原発事故原因…東電との訴訟和解(2014-9-12)
주36) 후쿠시마현 홈페이지, https://www.pref.fukushima.lg.jp/uploaded/library/futabaowabi.pdf
주37) 후쿠오카현 홈페이지, http://www.pref.fukuoka.lg.jp/contents/speedi.html/
주38) 카호쿠신보, “再稼働後SPEEDI活用せず·規制委”(2014-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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