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반핵운동의 역사에서 바라본 주민투표의미와 이후 과제
강원대학교 교수/삼척핵발전소반대투쟁위원회 공동대표 성원기
Ⅰ. 여는 글
2011년 후쿠시마 핵사고 이후 핵발전소의 위험성에 대하여 국민들의 인식이 매우 높아졌다. 핵발전소는 우라늄을 분열시켜 발생하는 막대한 에너지로 물을 끓여 전기를 생산하지만 우라늄 분열시 핵반응 후 생성물, 즉 인공방사능 물질인 방사능 요오드, 세슘, 스트론튬, 플로토늄 등은 고 에너지의 방사선을 끊임없이 내보내 온 생명의 생존을 직접적으로 위협한다. 즉, 인공 방사능물질과 인류를 비롯한 온 생명은 공존이 불가능한 것이다. 생명 자체를 부정하는 물질을 지속적으로 발생시키는 것은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 되지 못한다. 세상에 생명보다 우선시 되는 가치는 없기 때문이다.
일찍이 핵의 위험성을 깨우치고, 핵발전소를 막아내기 위하여 32년 째 싸워오고 있는 인구 7만의 해안가 작은 도시가 있다. 두 차례 핵을 막아내고 세 번째 핵과 맞서고 있는 곳, 그곳이 삼척이다. 삼척이 어떻게 핵과 싸워 왔으며, 향후 과제가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한다.
Ⅱ. 삼척 반핵운동의 역사
1982년 당시, 5공 정부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삼척원전 예정지역이 고시되면서 삼척과 핵발전소와의 악연은 시작되었다. 10년 후 1992년 실제 핵발전소 건설의 움직임이 보이자, 근덕면민을 중심으로 핵발전소 반대운동이 시작되었다. 근덕면원전 백지화 투쟁위원회가 결성되고 환경운동연합 활동가를 초청하여 핵의 위험성에 대하여 공부하였다. 인근 울진 핵발전소 지역은 타산지석이 되었다. 1993년에는 근덕면 38개리 전체 이장단이 사퇴하고 8월 29일 전체주민에 해당하는 7,000여명이 근덕초등학교에 집결하여 원전 백지화 항쟁에 돌입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후 삼척시민 전체가 합세하여 6년 여간 이어진 대규모 집회, 원전장례운구, 삭발 투쟁, 상경투쟁 등 피어린 항쟁을 통하여 1998년 12월 30일 삼척원전예정구역 고시를 해제시켰다. 전국 최초로 핵발전소 예정 부지를 백지화 시킨 것이다. 이를 기념하여 8.29 기념 공원을 조성하고 세계 최초로 원전 백지화 기념탑을 세웠다. 그리고 비문에 이렇게 새겼다. 「결사의 정신과 애향의 열정으로 청정해역과 수려한 산하를 지켰다. 우리의 반핵의지를 후손에게 계승한다.」 이렇게 첫 번째 핵을 막아내었다.
그리고 2005년 핵방폐장에 대한 시도도 시의회의 부결로 막아내었다. 두 번째 핵도 막아낸 것이다.
Ⅲ. 세 번째 핵과의 싸움, 그리고 주민투표
2010년 12월 16일 당시 삼척시장은 한수원에 삼척원전 유치신청을 하였다. 세 번째 핵과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사실 정부는 2010년 원전유치 신청을 받으면서 삼척은 제외지역으로 분류하여 신청 자체를 받지 않았어야 했다. 왜냐하면 이미 1998년, 정부는 삼척시민들의 뜻을 수용하여 삼척원전 예정지역고시를 해제고시 하였기 때문이다. 주민들이 그대로 살고 있는데 또 다시 신청을 받는다는 것은, 정부의 결정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으로 정부가 취할 자세가 아니다. 더구나 신청요건에 주민투표를 의무화하지 않아 주민간의 갈등을 구조화 하였다.
주민투표법은 주민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거나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지방자치단체의 주요 결정사항에 대하여 주민투표를 부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 한 가운데에 핵발전소가 들어오는 것 보다 더 이상 과도한 부담을 주거나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주요결정 사항은 없다. 정부는 2005년 핵발전소보다 덜 위험한 핵 폐기장을 유치신청 받으면서 주민투표를 의무화 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5년 후인 2010년 핵발전소 유치신청을 받으면서 주민투표를 의무화 하지 않고 시의회 동의만 받아 지자체장이 신청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2010년 12월 유치신청 이전에 결성된 삼척핵발전소반대 투쟁위원회(상임대표 박홍표신부)는 삼척시에 주민투표를 강력히 요구하였다. 시의회는 삼척시장 명의의 주민투표 실시 공문을 접수한 후 주민투표 실시 조건으로 삼척원전유치 동의안을 처리하였다. 그러나, 삼척시장의 주민투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2011년 2월 삼척시원자력산업 유치협의회에 의하여 원전유치찬성서명부가 작성되었다. 주민투표가 아닌 찬성서명부로 주민수용성을 대신하려 한 것이다.
삼척시 유권자 58,339명 중 56,551명이 찬성서명하였다고 하는 96.9%의 찬성서명부가 만들어진 것이다. 삼척반핵단체는 도저히 불가능한 찬성서명부의 허위를 확인하기 위하여 즉각 찬성서명부 열람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되었다.
한 도시의 전체 유권자 중에 96.9%의 주민이 서명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가능하지 않다. 더구나 1982년부터 2011년까지 29년간 핵과 싸워온 반핵의 땅 삼척에서 96.9%가 찬성서명을 하고 3.1%인 1,788명만 서명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실제 사실일 수가 없다.
그러나, 이 96.9%의 찬성서명부가 삼척시장과 삼척시원자력산업 유치협의회 명의로 청와대, 산업부, 한수원, 국회 등에 제출되어 삼척핵발전소유치 수용성의 가장 큰 근거로 사용되었다.
허위임이 분명한데 열람은 무시되고 국회에서 국감자료로 요구하여도 자료가 없다고 제출되지 않는 상황에서 실체가 드러나지 않고 96.9%의 찬성율만 남아 행세하였다. 또한, 삼척시장은 주민투표약속을 지켜 즉각 주민투표를 실시하라는 반핵단체의 요구를 무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2011년 12월 23일 한수원은 신규원전건설 후보지로 삼척과 영덕을 선정 발표하였다. 주민수용성은 96.9%의 찬성서명부로 이미 끝났다고 강변하며 주민투표를 계속 거부하는 상황에서 주민투표를 실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시장주민소환 밖에 없다고 판단한 삼척반핵단체는 2012년 6월 27일 삼척시장 주민소환운동에 돌입하였다. 삼척시장 주민소환 청구서명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소환운동 시기인 2012년 10월 30일 강원대학교 삼척캠퍼스 전체교수 204명 중 107명이 삼척핵발전소 유치 반대 입장을 밝히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유권자 15% 이상의 주민소환청구서명을 받아 2012년 7월 31일 삼척선관위에 서명부를 접수하였으며, 선관위는 이를 심사하여 2012년 9월 13일 주민소환투표 청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정부는 1998년 12월 30일 원전예정구역 지정고시를 철회하였던 삼척을 영덕과 함께 2012년 9월 14일 원전예정구역으로 다시 고시하였다. 2012년 10월 31일 실시된 삼척시장 주민 소환 투표는 방해와 억압으로 투표율이 1/3에 못 미치는 25.9%에 머물러 주민소환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후 2년간 반핵단체는 매주 수요미사, 촛불집회, 평일 1인 시위, 주말 시내도보순례, 전단지 배포, 대규모 집회, 3보 1배 등을 통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시민을 깨웠다. 그리고 억압을 기억하고 있던 삼척시민들은 2014년 6.4지방선거에서 핵발전소의 유치와 민주주의 훼손, 억압을 심판하고 반핵후보를 62.4%의 압도적 지지로 당선시키는 선거혁명을 이루어냈다. 삼척이 깨어난 것이다.
그리고, 핵발전소에 대한 진정한 민의를 보여주기 위하여 그토록 외쳐왔던 주민투표를 실시하기 위한 절차를 진행하였다. 2014년 8월 20일 삼척시는 원전유치신청 철회여부를 묻는 주민투표 동의안을 시의회에 제출하고 2014년 8월 26일 시의회는 만장일치로 주민투표 상정안을 가결시켰다. 그러나, 정부는 시의회 가결 당일 오후 원전유치는 국가사무이므로 주민투표의 대상이 아니라고 발표하였다. 원전유치신청이 지방사무라면 원전유치신청철회도 지방사무로 보아야 한다는 삼척시의 자문에 응한 법률가들의 공통된 의견에 따라 주민투표를 실시하려고 한 삼척시의 지방 자치권에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또한, 삼척시 선관위도 정부의 입장에 따라 투표관리 업무를 거부하였다.
삼척시민들은 지혜를 모았다. 2004년 부안 민간인 자율관리에 의한 주민투표가 삼척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9월 12일 삼척원전유치찬반투표 관리위원회가 구성되고,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핵발전소 유치 찬반을 묻는 주민투표의 일정이 사전투표일 10월 8일, 주민투표일 10월 9일로 9월 15일 공고되었다.
10월 7일 강원대학교(춘천캠퍼스, 삼척캠퍼스) 교수 184명이 <삼척핵발전소예정구역 철회를 요구한다>는 성명서를 통하여 삼척 주민투표 지지를 선언하였다. 일정에 따라 주민투표가 10월 8일(사전투표), 10월 9일 양일간에 걸쳐 실시되었으며, 결과는 68%의 투표율 중 압도적인 85%의 핵발전소 유치반대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주민투표 하루 전날인 10월 8일 사전투표일에 그동안 숨겨져 왔던 96.9% 찬성서명부를 김제남 의원이 국회에서 찾아내어 국감자료로 공개하였다. 공개된 찬성서명부는 한 페이지 15명의 서명이 동일인의 필체로 작성되는 등 허위로 가득하였다. 명의가 도용되는 등 허위찬성서명부임이 밝혀진 것이다.
Ⅳ. 맺는 글
이제 인류는 핵발전소에서 벗어나야 한다. 왜냐하면 핵과 인류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은 이미 탈핵을 실천하고 있으며 핵발전소에 의존하지 않고도 충분히 전기를 생산하여 사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10년간 태양광, 풍력 등 재생가능 에너지 산업을 육성하여 전기 비중을 20% 이상 끌어올리고 있으며, 매년 비중이 급상승 중이다. 특히, 독일은 현재 28%까지 비중을 높였으며 2022년 모든 핵발전소를 폐쇄시키고 2050년에는 80%비중까지 끌어 올려 화석연료로부터도 독립하려는 계획을 매년 초과달성 중이다.
우리나라는 핵발전소 비중 30%로, 독일처럼 10년에서 15년간 재생가능 에너지 산업을 육성하면 대체된다. 이제 세계는 탈핵의 길로 가고 있다. 수명 다한 노후 원전을 폐쇄하지 않고 현재 23기에서 추가로 18기를 더 지어 41기 까지 늘리려는 정부의 핵 확대 정책은 핵사고의 위험을 높이는 무모하고 위험천만한 정책이다. 체르노빌, 후쿠시마의 핵 사고에 보듯 반경 30km 이내에는 사람이 살지 못하는 땅으로 출입이 통제되고, 반경 300km 이내가 오염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그 영향이 최소한 300년간 이어진다. 이러한 사고를 막기 위해 노후 원전을 폐쇄하고 신규원전을 이제 그만 지어야 한다. 그 간절함에 삼척에 있다.
삼척에 핵발전소를 막는 것은 단지 삼척만 들어오지 않으면 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전국 어디에도 이제 핵발전소는 더 이상 지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정부는 기회 있을때 마다 신규핵발전소는 국민의 수용성, 주민의 수용성을 보아 결정한다고 하였다. 수용성은 핵발전소를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이다.
삼척은 어렵고 긴 투쟁을 통하여 주민자율로 주민투표를 실시하였고 압도적으로 85%가 반대하여 수용성이 없음을 세상에 보여주었다. 그리고 수용성의 근거가 되었던 96.9%의 찬성서명부도 허위임이 드러났다. 정부가 공언한대로 수용성이 없으므로 삼척핵발전소예정구역고시를 1998년에 이어 2014년 또 다시 정부가 핵발전소예정구역 고시를 해제하여야 한다.
그리고, 영덕은 삼척에서와 같이 주민이 수용성을 보여줄 것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정부가 직접 나서서 주민투표를 실시하고 더 나아가 우리나라 전체의 핵발전소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국민투표에 붙여 그 결과를 가지고 핵발전소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 순리이다.
지금 국민의 생명이 핵에 의해 좌우될 위기에 처해 있다. 현재 정부는 거꾸로 가고 있지만, 국민의 생존권을 지켜내기 위하여 간절하게 외치는 국민의 소리를 정부는 들어야 한다. 그것이 체르노빌, 후쿠시마의 비극을 우리가 반복하지 않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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